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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헌터? 북에서 활동한 유격대 진짜 있었다


입력 2011.06.26 09:03 수정        

<6.25 61주년 특별인터뷰>유격대 백골병단 송세용 장지영 차주찬 옹

인민군 유격대총사령관 생포 성과도…"살아돌아왔는데 반기긴 커녕..."

1951년 2월 7일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강동리에서 인민군 복장으로 적진 침투를 앞둔 결사 제12연대 330명의 작전을 격려, 지원하기 위해 육해공군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과 미 군사고문 하우스만 중령,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 수도사단장 송효찬 준장 등이 사열하고 있다. 1951년 2월 7일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강동리에서 인민군 복장으로 적진 침투를 앞둔 결사 제12연대 330명의 작전을 격려, 지원하기 위해 육해공군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과 미 군사고문 하우스만 중령,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 수도사단장 송효찬 준장 등이 사열하고 있다.

6.25 참전용사 백골병단 장지영, 송세용, 차주찬 옹.(왼쪽부터) 6.25 참전용사 백골병단 장지영, 송세용, 차주찬 옹.(왼쪽부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1951년 3월 30일 그들이 귀환했을 때, 불가능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리라고는 기대를 하기 어려웠다.

육군본부 직할 결사대 유격대. 국군 최초의 유격대로 창설돼 북한군 후방지역이던 강원도 영월, 평창, 양양, 인제 등지에서 활동했다. 1.4후퇴 이후 우리군은 수원 오산까지 밀렸다. 불과 몇 달전 서울 수복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도 전에 서울은 다시 북한군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중공군과 북한군의 합작으로 전세를 바뀌었다. 저지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남한땅을 내줄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다.

아군이 아니면 적인 전쟁터에서 북한군과 중공군 외에도 만만치않은 ‘적’이 곳곳에 있었다. 빨치산으로 불리는 북한의 인민유격대는 지리산 등 산악지역 일대에서 아군을 교란시키고 남한 주민의 분열을 꾀했다. 이들의 게릴라전법을 대응하가에 정규군의 전략은 2% 부족했다.

결국 일단의 병력을 ‘결사대 유격대’로 돌려 북한군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술을 펼치게 했다. 그 임무를 수행한 것이 육군본부 직할 결사대 유격대였다. 연락장교 생포, 지휘소 습격, 애국청년포섭과 기밀문서 획득, 생산기관 파괴 및 교란 보급로 파괴, 적의 투항 및 귀순 공작, 첩보망 구축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우리가 살아돌아오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은 듯 했어.”

6.25 전쟁 61주년을 앞두고 <데일리안>과 만난 육군본부 직할 결사대 유격대 출신 예비역들은 지난일을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송세용(79) 장지영(81) 차주찬 옹(78)은 “60여일의 전투가 마치 60년 같았다”고 회상했다.

역전의 용사들, 백발에 주름진 얼굴의 그들에게서 참전용사를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세월이 흐른 지금의 모습만 본 탓이다. 그러나 참전 당시의 나이를 생각하면 참전용사라는 단어가 어색해진다. 참전 당시 그들은 18~20살의 소년이었다.

6.25 참전용사 백골병단 송세용 옹. 6.25 참전용사 백골병단 송세용 옹.
“나라가 위급하다는데 당연히 참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지체 않고 참전하겠다고 입대해서 그 길로 훈련을 받았지.”(송세용 씨)

“북한군이 밀려들어와서 피난을 떠났다가 젊은이가 부족하다고, 군인이 필요하다는 이야길 들었어. 나라가 온통 북한군에게 빼앗길 판이라는데 가만 있을 수 있나. 그래서 입대했지.”(차주찬 씨)

“정국이 심상치않다, 후방유지도 별 의미가 없다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지. 전방에 병력이 필요하다면서 전투경찰 중 일부가 육군으로 편입됐지. 나 역시 그때 육군으로 편입되어서 유격대에 합류했지.”(장지영 씨)

송세용 씨와 차주찬 씨는 입대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장지영 씨는 전투경찰이었다. 책보를 들고 학교를 다녔을 10대 소년들은 사람을 죽고 죽이는 전장으로 나가야 했다. 후방에서 국군의 작전을 보조하고 지역의 차안유지 및 파르티잔, 일명 빨치산 소탕을 담당했던 전투경찰도 총을 들고 군인의 계급장을 달아야 했다. 전쟁은 이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국가가 무엇인지, 전쟁이 무엇인지, 사람을 죽여야 내가 사는 전쟁의 참혹함을 미처 알기도 전에 이들은 현역군인이 되고, 결사대가 되어 죽음의 길로 떠나야 했다.

세 명의 참전용사들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기억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미 8군 정보국과 우리군에서 ‘국군도 북한의 빨치산같은 유격대가 필요하다’고 판단을 하면서 만들어진 육군본부 직할 결사대 유격대, 즉 백골병단은 병단이라고 불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인원과 장비였다. ‘적의 후방에서 이들의 주의를 흐트러뜨리고 주요 정보를 수집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받은 훈련은 고작 3주였다. 대구 달성초등학교에 있던 제7훈련소(정보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대부분 실탄사격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전방에서 전투경험이 있는 병력을 뽑아오기 어려웠던 전세, 그로 인해 훈련병이 유격대의 계급장을 달고 북으로 갔다.

소령이라고 해도 학력에 따라 부여된 계급일 뿐, 전투경험과는 관계없었다. 군복도 북한군의 피복을 모방한 누비 방한복이었다. 무기는 북한군이 쓰던 소련제 장총과 기관단총 등 노획한 무기를 지급받았다. 노획한 무기였기 때문에 훈련병들이 지닌 무기는 제각각이었다. 그나마 총알이라도 나가면 다행이었다. 총알 자체가 나가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만은 노련한 군인 못지 않은 애국심으로 들끓었다. ‘내가 아니면 우리 가족이 죽는다’는 비장한 마음이었다.

송씨는 북한으로 떠나기 위해 길을 나섰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12연대였던 송씨는 1951년 2월 4일 새벽, 어둠을 헤치고 화물차에 몸을 실었다.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에서 출정식을 갖고 170명이 북으로 갔다. 차씨와 장씨가 소속됐던 11연대는 이보다 1주일 앞서 이미 떠난 뒤였다.

육해공군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 미 제8군 군사고문단 하우스만 중령의 훈시와 사열이 있을 정도로 사지로 떠나는 이들에게 거는 기대는 커보였다.

송씨는 “고위 장성들은 물론 미군 고문관과 삼군참모총장이 참석할 정도였으니 우리가 느낀 책임감은 강할 수 밖에 없었다”며 “당시 참모총장의 훈시 내용이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나라 군운들이 귀관들의 양 어깨에 있으니, 임무 수행 후 귀환하면 이계급 특진과 원하는 부대 배속을 약속하겠다’는 파격적인 이야기들 들은 터라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6.25 참전용사 백골병단 차주찬 옹. 6.25 참전용사 백골병단 차주찬 옹.
차씨와 장씨도 다르지 않았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참모총장의 사열과 훈시는 힘을 내게 했다. “장비도 열악하고 식량이라곤 미숫가루 2주일분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패기로 난관을 뚫자고 했다.”(차씨)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사람들이었지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그리고 위태로운 조국을 지키자고 마음먹었다.”(장씨)

하지만 전쟁은 패기로 되는 게 아니었다. 군사전략의 기본도 모르는 이들은 북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아군기의 오폭과 북한군의 기습으로 전우를 잃었다. 무전도 제대로 터지지 않는 상황에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들이 있던 강원도 오대산 등지는 북한군이 포위하던 지역이었다. 복장과 무기가 북한군의 것이라 해도 이들의 존재는 곧 알려졌다.

북한군과 공산당 조직을 흔들기 위해 각 지역별 책임자를 생포하는 과정에서 ‘남한군이 인민군 복장으로 들어왔다’는 소문은 퍼졌다. 곳곳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았다. 그러나 “적진의 심장부로 들어가기 위해” 밤을 타서 하루에 20∼30km를 이동해야 했다.

장씨는 “내가 죽지 않으면 적이 죽어야 하는 게 전투인데 우리의 무기는 변변한 게 없었다”며 “총알 하나 넣고 쏘고 나면 다시 재야 하는 재래식 무기를 지녔던 우리와 연발식 총을 지닌 북한군과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 전투라도 치를라치면 총이 아니라 육탄전으로 승부해야 했기 때문에 전우를 잃고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고 돌이켰다.

‘우리에게도 신식의 무기가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제대로 된 무기라도 주어졌더라면’이라는 안타까움이 커졌지만, 이들은 이미 고립된 상태였다. 보급도 없었고, 본부로부터의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소년의 티를 벗은 군인들은 지쳐갔다.

세 명의 참전용사들은 “적과의 싸움만큼 무서운 적은 굶주림과 추위였다”고 말했다. 차씨는 “보름 가까이 굶은 일도 있었다”며 “눈을 파먹으며 견뎠다. 언젠가는 집에 돌아갈 날이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계속되는 행군으로 피로는 누적됐지만 쉴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전우들이 쓰러졌다.

송씨는 “잠들 수 없었다. 힘이 없어 전우를 내 몸 하나 가누기도 어려울 정도 피곤했지만, 잠들면 동사하기 때문이었다”며 “실제로 여러 전우들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죽어갔다”고 말했다.

“잠들면 못 일어나. 한번은 옆에 있던 전우가 잠이 들어서 영 눈을 못 뜨더라고. 잠들지 말라고, 대검으로 허벅지를 찔러댔어. 그런데도 눈은 못 뜨고 그 길로 숨을 거뒀지.”(장씨)

남의 눈을 피해 산길을 타느라 눈으로 뒤범벅이 되고 군화와 의복은 온통 젖었지만, 갈아입을 수도 없었다. 여분의 의복이라곤 양말 두 켤레 뿐. 젖은 발로 산을 오르내려 전 대원들이 동상으로 고생했다. 발에 감각이 없어지고 곯아가도 마음놓고 온기를 쬘 수 없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사대 유격대는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51년 3월 18일 강원도 인제군 필례 마을에서 인민군 대남 유격대 총사령관이자 인민군 중앙당 5지대장인 길원팔 중장을 생포한 데 이어 참모장 강칠성 대좌 등 고급 간부 13명도 생포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1951년 3월 30일 귀환한 결사대 유격대의 인원은 260여명에 불과했다. 60여일 동안 과반이 넘는 364명의 전우가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송씨는 “돌아오고 나면 우리를 반겨줄 줄 알았다. 길원팔의 생포로 기밀정보를 얻은 우리 군에 여러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우리는 존재를 부정당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차씨는 “우리가 살아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당시에는 분통이 터진 적도 있었다”고 했다. 장씨 역시 “전사자에 대한 예우는 커녕 살아돌아온 이들에 대한 예우도 없었다”고 말했다.

결사대 유격대가 기동한 거리는 총 320여km.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이 한 이들은 적 사살 184명, 생포 305명, 각종 화기 204점을 노획하는 큰 전공을 세우고 귀환했지만, 영웅대접은 없었다. 귀환 이후 상부로부터는 향후 작전이나 계획에 대한 지시가 없었다. 육군본부에서는 ‘강릉 북방 석교리 소재 민가에서 적당히 분산 주둔하라’고만 할 뿐, 보급대책도 세워주지 않았다.

의복은 찢어지고 먹고 씻질 못해 이가 득시글했다. 퀭한 눈에 툭 불거진 광대뼈가 앙상한 대원들은 4월 말 미8군 예하로 편입되기 전까지 소속없는 신세였다. 미군의 북한 두백리 상륙작전에 참전할 병력 이외의 사람들은 귀가해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공식적인 해산도 없이 60여일간 그들이 치렀던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차씨는 “우리는 모두 군번이 2개”라고 했다. 병적이 없어져 귀가 후 다시 재징집됐기 때문이다. 송씨는 “우리 결사대 유격대 전우회장은 군번이 4개”라며 “사병군번, 장교군번 이렇게 하다보니 4개가 됐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장씨는 “군에서는 ‘우리가 복무한 기록이 없다’고 버티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며 “재징집된 것은 그래도 나았다. 가슴 아팠던 것은 전사한 전우들이 예우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사대 유격대원의 가족 중에는 자신의 아들이, 남편이 전장에서 숨을 거둔 것을 모르는 경우도 숱했다. 전사통보를 받지 못했던 탓이다. 전적비도 1990년 11월에야 세워졌다. 법적 보상 및 무공훈장 수여가 이뤄진 것 또한 2004년 ‘6.25전쟁 중 적 후방지역 작전수행공로자에 대한 군복무 인정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고나서였다. 몇 십년이 흐르면서 당시의 용사들은 국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결사대 유격대는 지난해 뒤늦은 전역식을 치렀다. 예비역 병장, 예비역 소령 등의 계급과 정식군번이 인정받기까지 60여년이 걸린 셈이다.

6.25 참전용사 백골병단 장지영 옹. 6.25 참전용사 백골병단 장지영 옹.
장 씨는 “아이들이(자녀들이) 아버지 축하드린다고 하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동안의 서운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고 말했다. 차 씨는 “국가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갔는데 존재를 부정당한 뒤 늘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중에 뒤늦게 인정을 받으니 감개가 무량했다”고 했다.

세 명의 참전용사들은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되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또 벌어져 노구라도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몇십년간 외면당해왔어도 국가에 대한 마음은 법적인 예우나 보상으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차씨는 “맨주먹 붉은피라는 건 과장이 아니었다. 단지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텼다”며 “그에 일조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송씨와 장씨는 “생사를 초월한 힘을 준 것은 여기서 무너지면 우리 가족과 국가를 잃는다는 정신력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아직 자신들의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6.25에 대해 젊은층들의 인식이 낮은 것이 안타깝지만, 그들에게 더 많이 알리지 못한 우리의 책임도 있다”며 “세상을 뜨는 날까지 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고리타분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런 희생 위에 자라났음을 생각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말을 남겼다.[데일리안 = 변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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