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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 리쿠르고스, 병영국가 '스파르타 스타일' 창안하다


입력 2014.12.21 10:39 수정 2014.12.28 09:23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35>천하일색 헬레네의 나라 스파르타를 두번 찾은 이유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스파르타를 두 번 찾은 이유

그리스 여행객들의 일정에서 자주 건너뛰는 곳 중에 하나가 스파르타이다. 현존하는 유물과 유적이 적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 문명의 대표적 유적들이 즐비한 아테네는 연중 전 세계 여행객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든다. 하지만 스파르타도 고대 시기에는 아테네와 더불어 그리스 문명을 대표하던 국가였다. 이 두 국가는 여러 측면에서 대조적인 특성을 지녔다. 아테네가 민주정을 창안하고 발전시켰다면 스파르타는 과두정이 통치하는 군사국가적 성격을 띠었다. 그리스 세계에서 안정되고 질서 있는 국가의 모델이 바로 스파르타였다.

따라서 아테네가 자유분방한 느낌을 주는 반면, 스파르타는 엄격한 통제를 연상시킨다. 이런 점은 두 국가의 대조적 장점이자 결정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리스 본토에서 국력과 영향력에서 각각 두드러졌던 이 두 국가는 서로의 강점을 살려 그리스 문명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지나친 경쟁심에 의해 제국주의적 길을 걷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격돌하여 그리스 문명을 쇠락시킨 주범이 되기도 했다.

그리스 고전을 읽고 현장을 답사하면서 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곳이 스파르타였다. 스파르타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도 매우 독특한 제도와 사회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리스 세계가 창출해낸 문화 예술적 역량에 기여한 바는 적었고, 고대기의 강성했던 그 영화에 비해 후대의 역사는 뚜렷한 자취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여러 영역에서 만들어낸 독특한 ‘스파르타 스타일’에 대한 향수와 동경은 당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후대의 서양 세계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는 무언가 스파르타의 숨은 마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실체는 무엇일까?

스파르타의 숨은 매력을 찾기 위해 필자의 여행은 두 번이나 반복되어야 했다. 2014년 2월 답사여행에서 그 매력을 찾는 일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다. 미케네 왕성 등 아르골리스 지방을 둘러보고 스파르타로 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스파르타를 둘러 볼 것이냐, 아니면 엘리스 지방으로 넘어가 올림피아 유적지를 볼 것인가 고민했다.

스파르타에서 타이게토스 산맥을 넘어 올림피아로 가기 위해서는 넉넉히 4시간은 잡아야 했다. 따라서 9시부터 개관하는 스파르타의 고고학 박물관과 아크로폴리스를 둘러보고 올림피아로 이동하면 이미 폐관시간인 오후 3시를 넘어 도착할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올림피아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한나절은 둘러봐야 할 곳이 아닌가. 그리스 동절기 답사여행은 이래서 힘들다. 우리나라와 달리 대부분의 유적지가 오후 3시에 문을 닫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조금 먼 거리에 떨어진 곳은 하루에 두 곳을 보기 힘들다.

할 수 없이 상대적으로 유적이 적은 스파르타를 이번엔 거르기로 했다. 결국 스파르타와의 첫 만남은 한 밤의 짧은 데이트가 되고 말았다. 하룻밤 묵는 것으로 대체되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 밤에 스파르타 시내 중심지에 있는 레오니다스 동상을 찾아가 둘러봤다. 무거운 청동 방패를 낀 강인한 왼손 팔뚝과 손아귀의 형상, 그리고 매서운 눈과 날카로운 칼끝이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려는 강인하고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병영국가였던 과거 스파르타의 역사와 특징을 레오니다스 동상 하나가 충분히 상징해 내는 것 같다.

2014년 2월 첫 번째 방문한 야밤에 찾은 스파르타 중심 시가지에 있는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박경귀 2014년 2월 첫 번째 방문한 야밤에 찾은 스파르타 중심 시가지에 있는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박경귀

2014년 8월 두 번째 한낮에 스파르타를 방문했을 때 본 레오니다스 왕 동상 ⓒ박경귀 2014년 8월 두 번째 한낮에 스파르타를 방문했을 때 본 레오니다스 왕 동상 ⓒ박경귀

새벽 5시에 스파르타를 떠나 올림피아로 향하며 스파르타를 다시 찾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8월에 다시 그리스를 찾았다. 특히 짧은 일정에도 스파르타를 두 번째 방문한 이유는 그때의 미안함을 달래고 또 차분히 스파르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설사 폐허가 된 곳이면 어떠랴. 폐허 속에서 과거를 상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게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를 구한 스파르타의 영웅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폐허가 된 군사강국 스파르타의 아크로폴리스

아무튼 스파르타는 바쁜 일정의 관광객들에게 무시되기 일쑤다. 하지만 그리스 문명 답사자라면 스파르타를 가볍게 보는 것은 금물이다. 지금 남아있는 유적의 초라함에 비추어 과거 스파르타의 번영했던 시절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

투키티데스가 2400년 전에 자신의 역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런 점을 경계하지 않았던가. 그 역시 당시에 남아 있던 미케네 왕성의 작은 규모로 미루어 그 시대로부터 1천여 년 전에 번성했던 미케네 왕국이 중심이 되었던 트로이 원정대의 규모를 의심하는 것이 잘못이듯,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역시 폐허가 된 후 후세의 의심을 받게 되리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미케네는 분명 작은 고을이었고, 당시의 도시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원정이 과연 시인들과 전설이 전하는 만큼 대규모였을까 의심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라케다이몬인들의 도시가 폐허가 되고 신전과 건축물의 기초만 남았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후세 사람들은 아마 그들에게 과연 명성만큼의 실력이 있었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Ⅰ, 10)

투키티데스 시절에도 이미 그랬듯이 스파르테 또는 라케다이몬이라 불렸던 스파르타의 옛 도시는 폐허가 된 지 오래되었다. 2400년 후에 이런 폐허를 찾을 여행객들이 갖게 될 실망감과 의구심을 투키티데스는 미리 간파하고 경계했던 것 같다. 스파르타의 아크로폴리스는 현재의 시가지 동쪽에 나란히 뻗은 낮은 구릉에 위치했다. 다른 도시의 아크로폴리스가 높은 산꼭대기에 구축된 반면, 스파르타의 아크로폴리스는 시가지보다 약간 높은 구릉에 자리 잡았다.

스파르타는 애초에 도시 전체를 두르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 스파르타인들은 성을 쌓는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아무리 아크로폴리스가 높은 산 위에 자리하고 철옹성 같은 성벽을 쌓는다 하더라고 강성한 군대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스파르타가 낮은 성벽이라도 일부 두른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인 BC 4세기 이후에 짧은 시기에 불과하다.

스파르타의 아크로폴리스 주변은 완전히 폐허가 된 채 수령이 천여 년은 넘은 직한 올리브 나무만 즐비하다. 수천 년 됨직한 올리브 나무들이 이곳이 역사가 깊은 곳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시가지 넘어 서쪽에 2400여 미터 높이의 험준한 타이게토스(Taygetus) 산맥이 길게 뻗어 있다. 동쪽 역시 1900여 미터 높이의 파르논(Parnon) 산맥이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스파르타는 이 두 큰 산맥이 삼면을 둘러싸고 그 사이 낮은 계곡에 드넓게 펼쳐진 평원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천혜의 요지이다. 사실 이들이 성벽을 구축하지 않은 것도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산악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이점을 살리려는 뜻도 있지 않았을까.

두 산맥에서 발원하는 작은 시내들이 모여 에우로타스 강을 이루고 이 강은 에게 해까지 흐르며 기름진 충적토를 안겨준다. 이렇게 형성된 라코니아 평원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아르고스 평원 못지않은 풍요로운 농사를 가능하게 했다. 스파르타가 외국에 대해 쇄국정책을 쓴 이유도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이런 풍요로운 환경에 힘입은 것 같다.

스파르타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시가지와 타이게토스 산맥, 주변이 온통 올리브 나무다. ⓒ박경귀 스파르타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시가지와 타이게토스 산맥, 주변이 온통 올리브 나무다. ⓒ박경귀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주변은 올리브 밭이다. 수천 년 됨직한 올리브 나무가 이곳의 연륜을 말해준다. ⓒ박경귀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주변은 올리브 밭이다. 수천 년 됨직한 올리브 나무가 이곳의 연륜을 말해준다. ⓒ박경귀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주변의 건물 터 및 방벽 유허 ⓒ박경귀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주변의 건물 터 및 방벽 유허 ⓒ박경귀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주변의 건물터, 건축 양식으로 보아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박경귀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주변의 건물터, 건축 양식으로 보아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박경귀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입구의 방벽 유허, 다양한 잡석을 쌓은 것으로 보아 로마 시대 이후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박경귀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입구의 방벽 유허, 다양한 잡석을 쌓은 것으로 보아 로마 시대 이후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박경귀

스파르타의 아크로폴리스 정상엔 어떤 건축물에 쓰였던 것인지도 모를 주춧돌이 몇 개 덩그러니 놓여있고, 올리브 나무만 듬성듬성 서 있다. 이곳이 붉은 망토를 두른 스파르타의 용맹스런 전사들이 누비던 곳이었을까. 이곳이 과연 그리스 최강, 아니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군사국가의 보루였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황량하다. 투키티데스의 예언 그대로이다. 2300여년의 세월이 옛 스파르타의 자취를 모두 앗아갔기 때문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굴된 실물 크기의 반신 전사 상이다. ‘레오니다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물론 실제 레오니다스 상으로 볼 수는 없다. 전쟁 영웅의 조각상으로 신전의 박공벽에 안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인한 스파르타 전사의 형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투구의 상단을 볏 모양으로 장식하고 얼굴을 보호하는 투구의 옆면에 숫양의 머리로 장식한 점이 특이하다. 또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던 스파르타의 풍습도 볼 수 있다.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굴된 실물 크기의 반신 전사 상이다. ‘레오니다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물론 실제 레오니다스 상으로 볼 수는 없다. 전쟁 영웅의 조각상으로 신전의 박공벽에 안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인한 스파르타 전사의 형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투구의 상단을 볏 모양으로 장식하고 얼굴을 보호하는 투구의 옆면에 숫양의 머리로 장식한 점이 특이하다. 또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던 스파르타의 풍습도 볼 수 있다.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그렇지만 이곳은 험준한 타이게토스 산맥을 넘어 같은 그리스 민족인 메세니아 인들을 정복하여 농노로 삼고 자신들을 부양하게 만들었던 스파르타의 중심 아크로폴리스가 분명히 맞다.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heilotai)라고 불린 메세니아 인들의 희생 위에서 번영했다.

다른 그리스 국가들, 그리고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이유다. 그리스의 대부분의 국가 역시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민족과의 전쟁에서 노예를 획득하거나, 도시국가 간의 전쟁 포로의 일부를 노예로 삼는 경우는 있었지만, 같은 그리스 도시 국가 전체의 시민을 노예를 삼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당시의 메세니아 인들을 생각하면 애잔함을 금할 수 없다. 이들을 혹독하게 착취하던 스파르타의 냉혹함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힘이 약했던 메세니아는 최강자를 옆에 둔 까닭에 수백 년 동안 수난을 겪어야 했다.

옛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서 바라본 현대의 스파르타 시가지와 타이게토스 산맥 ⓒ박경귀 옛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서 바라본 현대의 스파르타 시가지와 타이게토스 산맥 ⓒ박경귀

아크로폴리스 주변의 건물 기둥 잔해, 주변은 온통 올리브 밭이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 주변의 건물 기둥 잔해, 주변은 온통 올리브 밭이다. ⓒ박경귀

천하일색 헬레네 왕비의 나라 스파르타

스파르타가 처음 등장한 문헌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다. 트로이 전쟁을 그린 대서사시 ‘일리아스’는 자신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를 붙잡아 요절을 내고, 트로이를 멸망시키기 위해 정복 전쟁을 준비하던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준령에 둘러싸여 협곡이 많은 라케다이몬과
파리스, 스파르테 그리고 비들기의 고장 메세를 차지한 자들과,
아뮈클라이와 헬로스의 해안 성채를 차지한 자들과,
라아스를 차지한 자들과, 오이튈로스 부근에 사는 자들,
이들의 함선 예순 척은 아가멤논의 아우인 목청 좋은 메넬라오스가
지휘했는데 형제는 저마다 따로 무장했던 것이다.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열성을 믿고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싸움터로 내몰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헬레네로 인한
노고와 탄식을 앙갚음하기를 누구보다도 열망하고 있었다.“ (Ⅰ581~590)


트로이 성으로 입성한 메넬라오스는 헬레네를 찾아내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메넬라오스는 정작 천하일색의 헬레네의 자태를 보자, 칼을 떨어뜨리고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의 손에 이끌리고 있다. 메넬라오스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움에 구석에 숨었던 시녀가 헬레네의 당당한 태도를 당혹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리스 왕자의 품에 안기던 헬레네가 아니었던가. 메넬라오스의 10년의 미움도 싹 가시게 할 만큼 헬레네의 미색이 고혹적이긴 하다. ‘헬레네와 메넬라오스’, 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1751~1829) 1816년 작, 독일 Schloss Eutin 박물관, 사진 Das Homer-Zimmer 트로이 성으로 입성한 메넬라오스는 헬레네를 찾아내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메넬라오스는 정작 천하일색의 헬레네의 자태를 보자, 칼을 떨어뜨리고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의 손에 이끌리고 있다. 메넬라오스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움에 구석에 숨었던 시녀가 헬레네의 당당한 태도를 당혹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리스 왕자의 품에 안기던 헬레네가 아니었던가. 메넬라오스의 10년의 미움도 싹 가시게 할 만큼 헬레네의 미색이 고혹적이긴 하다. ‘헬레네와 메넬라오스’, 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1751~1829) 1816년 작, 독일 Schloss Eutin 박물관, 사진 Das Homer-Zimmer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던 미케네 시대 후기만 해도 스파르타는 그렇게 강성한 국가는 아니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풍요로운 평원을 차지한 라코니아 지방의 여러 도시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3700년에서 3200년 전에는 아가멤논이 왕으로 있던 미케네 왕국, 아르고스 왕국, 티린스 왕국 등 아르골리스 지방의 도시들이 미케네 시대의 주류 국가였다.

트로이 전쟁에 동원된 함선 목록을 봐도 라코니아 전 지역에서 80척이 참전한 데 비해 미케네 지역에선 100척의 함선과 훨씬 많은 병사들이 참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인 아가멤논이 최대의 강국인 미케네 왕국의 왕으로 있었고, 아우인 메넬라오스가 스파르타의 왕으로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라코니아 지방이 아르골리스 지방에 비해 국력이 미약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트레우스 가의 두 형제가 라코니아 지방과 아르골리스 지방의 중요 도시를 통치하고 있었던 만큼 이 가문의 세력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에서 가장 막강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트로이 전쟁에서 아가멤논이 총사령관을 맡고 메넬라오스가 핵심 참모 역할을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스파르타 왕비 납치 사건으로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스파르타와 라코니아 지방은 트로이 전쟁에서 승전한 이후 대 격변에 의해 몰락한다. 라코니아 지방 전역이 BC 1100년에서 700년 사이에 북쪽에서 내려온 도리스 족에게 정복당해 파괴된 것이다. 그 이전인 BC 1200년경에 미케네 왕국을 위시한 아르골리스 지방의 왕국들이 파괴된 뒤에 이어진 참화였다. 이후 400여 년 동안 고대 그리스 역사는 암흑기를 겪게 된다.

따라서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스파르타 인들이 이후 고전기의 스파르타 인들의 직접적인 조상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BC 12 세기에 침입한 도리스 족을 고대 스파르타의 조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새로 이주한 도리스 족은 과거 미케네 시대의 원주민들의 종교와 역사, 문화를 그대로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새로운 정복자들도 여전히 미의 화신인 헬레네와 그녀의 두 쌍둥이 오빠인 디오스쿠리(Dioscure,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뜻)인 카스토르(Castor)와 폴리데우케스(Polydeuces)를 숭배했던 것으로 보아 그렇다. 디오스쿠리는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하여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오스(Tyndareos)의 아내 레다(Leda)를 겁탈하여 낳은 신의 자식들이다. 이 두 형제는 남달리 우애가 깊었다. 누이인 헬레네가 아테네의 테세우스에게 납치되었을 때 구해온 것도 이들이었다. 용맹하기로도 이름난 이유다.

백조로 변신하여 레다를 겁탈하는 제우스, 제우스를 부추기는 에로스의 모습이 보인다. 크레타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백조로 변신하여 레다를 겁탈하는 제우스, 제우스를 부추기는 에로스의 모습이 보인다. 크레타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봉헌 비석에 새겨진 디오스쿠리의 모습, 디오스쿠리의 용맹을 숭상한 스파르타 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BC 6세기 말에서 BC 5세기 초 작품,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봉헌 비석에 새겨진 디오스쿠리의 모습, 디오스쿠리의 용맹을 숭상한 스파르타 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BC 6세기 말에서 BC 5세기 초 작품,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봉헌 비석에 새겨진 디오스쿠리의 모습, BC 575~ 550년 작품 추정,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봉헌 비석에 새겨진 디오스쿠리의 모습, BC 575~ 550년 작품 추정,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현인 리쿠르고스 ‘스파르타 스타일’을 창안하다

스파르타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은 BC 8세기 중엽이다. 스파르타 인들은 거대한 타이게토스 산맥에 가로 막혀 그때까지 세력을 확장하기 어려웠던 메세니아 정복에 나선다. 최종적으로 BC 710경 메세니아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메세니아 인들을 노예 헤일로타이(heilotai)로 삼았다.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로 하여금 농업을 감당하게 하고, 상공업과 무역 부문은 외곽 촌락지역에 거주하던 반자유인인 페리오이코이(perioikoi)가 주도하도록 했다. 페리오이코이는 자유인이었지만 투표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도리스 족이 침입한 이후 라코니아 해안 쪽으로 밀려난 미케네 시대의 후손들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때부터 스파르타의 국가 경영 체계가 병영국가체계로 굳어지게 된 것 같다. 스파르타 주민의 80% 이상을 차지했던 헤일로타이를 강력하게 지배하기 위해 10%가 채 안 된 스파르타 자유 시민들은 일체의 농사일에서 면제되고 모두 병영에서 집단생활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스파르타는 강력한 군사국가가 된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메세니아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메세니아 인들과 매년 전쟁을 선포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긴장을 조성하고 때때로 살육을 통한 억압체제를 유지했다. 그로인해 메세니아 인들의 끊임없는 반란으로 국가적 위기를 자초한 경우도 자주 있었다.

스파르타가 특유의 국가 법령과 통치체계, 군사제도를 정립하게 된 것은 천재적인 정치가 리쿠르고스(Lykurgos)의 개혁 덕분이었다. 그는 출몰연도가 불명확한 신비의 인물이다.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다는 일설까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대개 7세기경에 실존했던 인물로 본다. 그는 스파르타의 실질적인 설계자였다. 그는 이른바 ‘리쿠르고스(Lykurgos) 체제’를 만들어냈다. 그가 만든 스파르타 법전, ‘그레이트 레트라(Great Rhetra)’은 신탁에 의한 것으로 신성시되었고, 스파르타 국가 운영체계의 근간이 된다.

리쿠르고스가 제정한 통치체계와 스파르타의 법률은 크레타의 법제를 모방하여 그가 창안한 것이었다는 설과 델포이의 여사제 피티아에게 청원하여 그녀에게서 영감을 얻어 설계하고 아폴론의 승인을 받았다는 설이 전해진다. 아마 델포이 승인설은 리쿠르고스가 만든 법제의 신성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설화가 아닐까 싶다.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Lycurgus), Merry-Joseph Blondel(1781~1853) 1828년 작, 프랑스 피칼디(Picardie) 미술관 소장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Lycurgus), Merry-Joseph Blondel(1781~1853) 1828년 작, 프랑스 피칼디(Picardie) 미술관 소장

델포이의 피티아 사제에게 청원하는 리쿠르고스, Eugene Delacroix(1798~1863) 1835/1845년 작, 미국 미시간 대학 박물관 소장 델포이의 피티아 사제에게 청원하는 리쿠르고스, Eugene Delacroix(1798~1863) 1835/1845년 작, 미국 미시간 대학 박물관 소장

‘그레이트 레트라(Great Rhetra)’의 주요 내용을 보자. 리쿠르고스는 최고 통치기구로 두 명의 왕을 두었고, 왕을 포함하여 30명으로 구성된 게루시아(gerousia)는 60세 이상의 장로들로 선발하여 원로원의 역할을 하게 했다. 게루시아가 안건을 발의하고 ‘최종 판단을 내릴’ 권리는 다모스(damos), 즉 자유 시민들로 구성된 민회가 갖도록 했다. 하지만 다모스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게루시아와 왕들이 결정을 취소할 수 있도록 거부권을 부여했다. 또 5명의 에포로이(ephoroi), 즉 행정장관을 두어 왕권을 견제하고 감독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명의 공동 왕을 둔 점도 이색적이다. 인류 역사상 명멸한 수많은 군주 국가들은 오로지 태양이 하나이듯 한 명의 최고 권력자가 권력의 영광을 독점했다. 그런 점에서 두 명의 공동 왕을 둔 스파르타의 왕정은 위태롭게 보인다. 두 명의 왕은 서로 원만하게 협력하고 견제하며 국가를 합리적으로 이끄는데 순기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위한 경쟁과 반목이 과열될 때는 서로 억압하고 음해하거나 심지어 추방하고, 여러 방식을 동원해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그럴 때의 국가는 늘 위기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럼에도 공동 왕 제도는 전반적으로는 순기능이 더 많았다. 특히 왕은 전쟁의 최고사령관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이자 권한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유고시 국정의 혼란을 최소화하는 장치로 기능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본체제는 스파르타가 쇠퇴할 때까지 존속했다. 스파르타는 왕정을 바탕으로 했지만, 실질적으론 게루시아와 에포로이가 막강한 권력을 함께 행사한 전제 과두정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스파르타의 정치체제의 지향은 숙명적으로 아테네와 늘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주도적으로 전파한 민주정에 반대했다. 스파르타가 그리스에서 패권을 잡게 되었을 때 다른 연맹의 도시국가들에게 과두정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던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스파르타가 마침내 아테네를 굴복시켰을 때에 제일 먼저 취한 조치가 아테네 민주정을 무너뜨리고 30인 참주정을 꼭두각시로 세운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스파르타의 가장 독특한 점은 병영국가적 특성을 가졌고, 모든 국가 운영의 전략 초점을 여기에 맞췄다는 점이다. 청소년들의 공교육인 아고게(agoge)도 강한 체력과 애국심을 길러 미래의 전사로 성장하는데 기여하도록 했고, 여느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달리 여성들에게도 공교육을 실시했다.

이 또한 훌륭한 자녀를 낳고 기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차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고게 교육과정은 스파르타 시민만의 특권이자 의무였고, 이를 무사히 마칠 경우 스파르타 시민으로 당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특히 성인 시민의 경우 집단 병영생활을 통해 공동식사, 공동기숙을 통해 일체감과 단결심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스파르타 시민들이 오로지 군사적 훈련에 집중하여 전투력 배양을 통해 최강의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 활동에서 해방되었기에 가능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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