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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두 얼굴 '만난 이도 못만난 이도...'


입력 2015.02.19 10:21 수정 2015.02.19 10:26        이슬기 기자

못만난 가족은 "천국에서 만나면...북 가족에게 상속할 길 열어주기를"

이미 만난 가족도 "이젠 살아서 그 애들 못 보겠죠. 꿈에라도 나왔으면..."

지난해 통일준비위원회 명의로 우리 정부가 북한 측에 이산가족상봉을 제안하면서 지난해에 이어 이산가족상봉 행사가 개최될지 주목되고 있다. 지난 1월 31일 기준, 이산가족상봉 신청자는 12만9655명. 이 가운데 북녘의 가족을 끝내 보지못하고 세상을 뜬 사람들도 상당수다.

19차례에 걸친 이산가족상봉행사를 개최했지만 6만8303명의 이산가족상봉 신청자들은 여전히 북녘의 가족들을 만날 날을 학수고대 하고 있다. 이에 데일리안은 최초 이산가족상봉 30주년을 맞이해 피붙이와 생이별한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재조명하고, 이산가족상봉 행사 실무를 맡고있는 대한적십자사 직원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봤다. < 편집자 주 >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는 박용국씨.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는 박용국씨.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는 박용국씨.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는 박용국씨.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나중에 천국 가서 만나면 다 이야기 할 수 있겠죠. 내가 뭐라도 준비해놔야 우리 아버님, 어머님 만났을 때 ‘야, 너만 먹고살고 고향에 애들은 모른척 했냐’는 말 안듣고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일흔 아홉의 박용국(남.79) 씨가 요즘 부쩍 마음을 쓰는 건 ‘교정 작업’이다. 이전에 작성해 둔 편지 초안을 읽다보면, 그때마다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자꾸 생겨서다.

재산이라야 용산에 있는 소박한 집 한 채 정도지만,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 북에 있는 조카들과 조카손주들에게 생활비 정도 전해줄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감에, 그리고 언제 기억이 희미해질지 모른다는 조바심에, 박 씨는 오늘도 펜을 쥐고 숫자들을 셈해본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은 이미 접수 초기였던 15년 전에 해뒀다. 가끔 적십자사로부터 ‘신청한 건 아직 유효하니 기다려보자’는 연락이 오긴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순서가 올거라는 믿음은 거의 닳아 없어졌다. 부모님이야 살아계셔도 100세가 넘으셨을 세월이 흐른만큼, 피난 당시 출가한 누님 가족과 형의 자녀들이라도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기대는 닳았지만 그리움은 깊어진다.

막내둥이였던 박 씨가 피난길에 오른 건 열네살 때다. 개성에서 50리 떨어진 황해도 연백의 농사꾼이던 그의 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으셨던지, 6.25가 나던 해 아들을 미리 서울로 유학보냈다. 인민군이 서울까지 내려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터, 당시 50줄의 부모님께서는 “전쟁이 어차피 오래가지 않을테니 일단 남자들만 갔다가 금방 돌아오라”며 박 씨와 공무원이었던 그의 형을 재촉했고, 이들은 인천에서 화물선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 후 3.8선이 휴전선이 되리라고 생각한 이가 있었을까. 박 씨는 그 길로 가족과 영영 헤어졌다. 그는 “어차피 별로 오래가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금방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게 끝이었어요”라며 “떠날 때 그냥 ‘안녕’하고 떠났고, 어려서 애뜻한 감정도 별로 없었어요. 금방 올 줄 알았으니까요”라고 회상했다.

나이도 어린 데다 전쟁이 오래갈 줄도 몰랐던 그는 그 흔한 가족사진 한 장 갖고 나온 게 없다. 그리울 때 눈으로나마 좇아갈 만한 기록 하나 없는 것이다. 다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게 있다. 늙으신 어머님의 얼굴이다.

“고향 떠나면서 우리가 배를 타고 건너갈 때 장면이 눈에 선해요. 연로하신 어머님이 아들 사랑하셔서 짐 보따리를 이고 우리와 수일을 걸어서 배웅나오면서 잘가라고 떠나보내신 게 참 많이 생각나요. 어머님 만나면 ‘어머님이 그러셨죠? 짐을 이렇게 이고 배웅 나오셔서 보내셨죠?’ 말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어.” 그의 굵은 눈주름 사이로 눈물이 고였다.

박 씨는 약 7년 전 북한을 돕는 단체의 후원자 자격으로 평앙에 다녀온 적이 있다. 물론 북 측의 허가 없이는 호텔 밖 10m조차 나가지 못했고, 개선문이나 탑, 김정일·김일성 기념관 등 북 측이 공개한 것 외엔 볼 수 없었다. 평양시내 공항에 도착해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부모들이 마중나와 “야 어디갔다가 지금오냐”라며 반겨줄 것 같아서다. 수백번도 그리던 장면이었지만, 박 씨를 부르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눈물이 왈칵 흐르는 것을 화장실로 급히 뛰어들어가 소리 없이 울었다.

인터뷰 말미에 박 씨는 “그렇잖아도 적십자사나 통일부에 찾아가서 꼭 제안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라며 입을 열었다.

그는 “약 2년전 북에 남겨둔 아들이 남한으로 피난왔던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 받겠다며 소를 제기했고, 법원이 긍정적으로 판결해서 상속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는 기사를 봤어요”라며 “남에 있는 이산가족 대부분 나이가 많잖아요. 얼마 안되는 재산이지만 북에 있는 조카와 손자들에게 전해주면,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친족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국가 차원의 정책 공조가 필요한 이유도 강조했다. 이산가족 상봉이라 해봐야 1년에 한번 이뤄지기도 어려운 상황인 만큼, 양 측 은행이 혈육 간 재산을 상속할 수 있도록 공식적 통로를 열어줌으로써 북한 주민의 생활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서로의 생사 여부도 확인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박 씨는 재차 힘을 실어 말했다.

박 씨는 또 “물론 여기서도 상속세, 증여세 내니까 북에서 만약 그걸 내라면 얼마든지 낼 용의가 있어요. 거기선 사람이 굶어죽는데 내가 여기서 밥 한그릇 덜 먹고 감수하고라도 꼭 보내주고 싶지 않겠어요?”라며 “어렵게 당첨이 돼서 만나도 그걸로 끝이고 또 못 보게 되니까 국가 차원에서 그런 정책적 길을 꼭 터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당부했다.

그는 오늘도 유언장 같은 편지를 다시 구상하며 고친다. 혹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그 날’이 왔을 때, 아들에게 맡겨 조카와 손주들 몫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배웅을 하겠다면 나선 박 씨가 자신과 부인, 아들 딸 내외와 손주가 한 데 모여 25명의 대가족이 웃고 있는 가족사진을 소개하며 말했다.

“나 하나 피난 나와서 이렇게 25명이 됐어요. 너무 감사하죠. 나중에 천국가서 만나면 이런거 다 얘기하고 그런 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4년 설 계기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북측의 가족을 만난 이창주 씨.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2014년 설 계기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북측의 가족을 만난 이창주 씨.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2014년 설 계기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북측의 가족을 만난 이창주 씨가 북의 조카들이 전해준 사진을 보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2014년 설 계기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북측의 가족을 만난 이창주 씨가 북의 조카들이 전해준 사진을 보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꿈에라도 나왔으면...이제 또 그 애들을 살아서 보겠어요?"

북녘에 두고 온 가족과의 만남을 학수고대하는 이가 있는 반면, 이산가족 상봉 방문단에 선정됐음에도 이를 거절했던 신청자도 있다. 얼굴 한 번 못 본 조카들만 남았다는 소식에 "만나서 뭣 하느냐"는 거리감이 먼저 밀려와서다.

처음 적십자사로부터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에 포함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창주(여. 81)씨는 “안 가겠다”며 접수를 취소했다. 북 측에서 이 씨의 혈육이라고 보내온 명단은 작은조카들, 즉 이미 세상을 떠난 작은언니의 두 아들 뿐이었다. 이 씨가 피난온 이후에야 작은언니가 북에서 낳은 아이들인 만큼, 사실상 이 씨와는 ‘생면부지’의 남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 씨를 설득한 건 남편이었다. 그는 이 씨에게 “왜 이런 기회를 놓치려고 하느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지금 갔다오라”며 재접수를 종용했고, 적십자 측도 재차 이 씨를 설득한 끝에 결국 신청자 명단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그 선택은 1년이 지난 지금도 두고두고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잘한 일’이 되었다. 이 씨는 “날 본적도 없는 애들을 뭣하러 만나러가느냐고 취소했었는데, 막상 애들을 만나고 돌아오니 안갔더라면 너무나 후회할 뻔 했다”며 “가길 정말 잘했다”고 몇 번씩이나 되뇌었다.

형부가 북에서 공군 조종사로 일한 터라, 그의 아들들은 다른 북한 주민들에 비해 경제적·사회적으로 여유가 있는 듯 구김살이 없어 보였다. 고위간부는 아니더라도 당원 정도는 될 법한 여유가 느껴졌다는 게 이 씨의 설명이다. 실제 그가 보여준 상봉 당일 사진 속에는 얼굴빛이 환한 두 조카가 깨끗한 양복을 차려입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이 씨는 “큰오빠와 큰언니 애들도 북에 있는데 걔들은 안 나오고 작은조카들만 내보낸 걸 보니 아무래도 그 중에서 가장 잘 살고 있는 애들을 내보낸 것 같더라”며 “조카들이 정말 씩씩하고 똑똑하고 내게도 ‘이모, 이모’ 하면서 얼마나 반갑게 말 하는지 마음이 아주 좋았다. 못 사는 걸 보고 왔으면 괜히 더 힘들었을텐데 나는 상봉 이후로 마음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소식이라도 듣길 바랐던 형제들의 생사도 알게됐다. 조카들이 “아버지(이 씨의 형부) 환갑 잔치 때 찍었다”며 갖고 나온 빛바랜 사진에는 피난 길에 붙잡혀서 죽은줄로만 알았던 작은 오빠를 비롯해 밤마다 떠올렸던 작은언니, 그리고 큰언니의 모습도 담겨있었다. 생사를 알게된 것만도 감사해 사진을 붙들고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꿈같은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고, 그게 전부였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접은 지 오래다. 사진을 바라보던 이 씨는 “그저 꿈만 같아요. 갔다와서도 그저 꿈에서라도 한번 봤으면 싶은데 안보이네. 꿈에도 안보여”라며 “참 희안해요. 다른 일들은 그래도 지나가면 생각나서 나중에 꿈에라도 보는데 얘들은 한번도 안보여, 꿈에도 못 봤어 꿈에도...”라며 말을 삼켰다.

1951년 1월 4일. 열여섯 소녀는 임신 막달인 올케언니와 조카 둘, 사돈처녀네 남매와 함께 장로님댁 수레를 붙잡고 고향을 나섰다. 1.4 후퇴 당시 사방에서 터지는 대포 때문에 당장 견디기가 힘들다며 허름한 수레에 닷새 먹을 음식과 이부자리만 대충 챙긴 참이었다. 몇 밤만 자고 나면 어머니와 작은언니에게 돌아갈 줄 알았다.

임진강 고랑포 부근에서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고 돌아보니 폭격과 함께 다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불룩해진 배 때문에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올케 언니는 포화 속으로 사라졌다. ‘중공군이 따라온다’는 사람들의 비명과 총소리에 쫓기다 사돈처녀는 총에 맞아 피를 줄줄 흘리며 임진강을 건넜다. 교회에서 주는 우유죽으로 연명하며 한 달이 지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군종의 도움으로 교회 부설 고아원에 넘겨졌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닷새만 피했다가 돌아오자”는 어른들의 말에 쫄래쫄래 따라나섰던 깡마른 소녀는 그렇게 고향땅을 다시는 밟지 못한 채, 여든을 넘긴 노인이 됐다. 65년의 세월은 앳되었던 소녀의 얼굴은 물론, 그리움마저 쇠하게 만드는 듯 보였다. 그는 “이제 뭐 다시 볼 수 있겠어요?”라며 "우리가 통일 되는 걸 보겠어요 이 나이에?”라고 되물었다.

“이젠 나이가 너무 많아요. 내 나이가 팔십하납니다. 언제 통일이 될줄 알고, 내가 이제 그 애들을 살아서 보겠어요? 꿈에서나 나와주면 좋을텐데.”

이 씨의 시선이 잠시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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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 기자 (wisdom@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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