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어느 6.25 참전용사의 회고…비석고지 전투의 진실은...


입력 2016.06.25 10:06 수정 2016.06.25 10:06        목용재 기자

<인터뷰>'태극무공훈장' 최득수 당시 이등상사

30명중 다죽고 5명으로 중공군 기관총 진지 격파

최득수 6.25참전용사.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최득수 6.25참전용사.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지난 17일 '데일리안'과 만난 최득수 옹(89)은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도 6.25전쟁 당시의 치열하고 참혹했던 전장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한청년단 훈련계장, 감찰부 출신의 최 옹은 북한 인민군이 남한으로 들어와 자유를 부르짖던 사람들을 총살하고 그들을 팔미도 앞바다에 버리는 등의 만행을 보고 치를 떨다가 유엔 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종료된 이후인 1950년 12월 군에 입대했다.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는 6.25전쟁을 겪은 군인들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일이지만 당시 이등상사로 전투에 참여했던 최 옹에게는 '불가능한' 명령만 하달됐다. 최 옹은 일개 분대 병력으로 '크리스마스 고지'의 길목을 사수해야 했고 수류탄 6발을 든 30명 특공대의 육탄 돌격으로 양구비석고지 기관총 진지를 격파해야만했다.

이 때문에 최 옹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들에게 수여되는 우리나라의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정전이후 1954년에 받았다.

최득수 6.25참전용사.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최득수 6.25참전용사.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최 옹은 전쟁 당시 가장 난감했던 기억으로 크리스마스 고지의 길목을 일개 분대로 사수했던 일화를 꼽았다. 크리스마스 고지의 아군 전초에서 경기관총 분대장으로 있던 최 옹은 사수, 부사수, 탄약수 2명 등 4명의 휘하 분대원과 함께 전초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중대장은 최 옹에게 그 지역을 사수할 것을 명령하고 자신은 중대병력을 인솔해 해당 지역에서 철수했다. 철수명령을 듣지 못한 최 옹은 휘하 분대원들과 함께 경기관총을 전방을 향해 발사하면서 '지역 사수 명령'을 이행했다.

최 옹은 "당시 내 분대만 그 지역을 지키고 있었다. 실탄이 떨어져서 중대에 연락해보니 후퇴했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경기관총을 운용하기 위해 노리쇠에 기름을 계속 치다보니 분대원 전원 얼굴이 전부 기름 범벅이 돼버렸다. 다행히 인민군이 몰려오지 않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 했다.

최 옹은 정전협정 이후 훈장을 받은 중대장을 만났다. 이를 본 최 옹은 "우리 분대원들 목숨 값으로 훈장 받은거 아닌가. 훈장을 반납하고 당시 우리 분대원들에게 돌려라"면서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1953년, 정전협정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더 땅을 차지하려는 남북의 전투가 치열한 가운데 최 옹에게 하달된 양구비석고지 인민군 기관총 진지 격파 임무도 사실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1953년 6월 26일 강원도 양구 인근 중공군은 야포와 박격포의 지원을 받아 압도적인 병력으로 아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비석고지를 점령했다. 당시 최 옹이 배속돼 있던 국군 제7사단 8연대 2대대는 백병전까지 치르며 고지 탈환을 시도했지만 이 과정에서 대대장이 전사하는 등 1300여명의 전력이 희생을 치렀다. 고지의 요지에 3문의 기관총진지가 자리를 잡고 있어 탈환이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최 옹은 "우리 중대가 5중대랑 교대하고 후방에 빠져있었는데, 이틀 만에 고지를 점령당했다. 5중대는 전멸했는데 그 현장은 정말 참혹했다. 산이 시체로 덮여있었다"면서 "기관포 3문이 요지에 있어서 고지탈환에 나서기만 하면 발사하는 바람에 인명의 피해가 너무 컸다. 우리 2대대에 임시 지휘관이 왔지만 이미 우리 대대는 무용지물인 상황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 했다.

최 옹은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우리 대대에 경기관총 사수·부사수, 박격포 사수·부사수 제외한 전 병력을 모아놨는데 생존인원이 30명밖에 안됐다"면서 "당시 8연대장이 나를 부르고 수류탄 6발을 주면서 특공조 1조장을 맡으라고 했다. 경기 기관포 3문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말했다.

당시 최 옹을 비롯한 특공대 30명은 미군이 뿌려놓은 연막 사이로 경기관포 진지 3곳을 향해 돌격했다. 이 과정에서 25명의 특공대는 전사하고 최 옹을 포함한 단 5명만이 생존해 기관포 진지 3곳을 파괴했다.

최 옹은 "기관포 때문에 미군이 연막탄을 뿌려놨는데 돌격하는 중간 중간 호에다가 아군 병력2명씩을 집어 넣으면서 진격을 했다"면서 "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임무 수행 후 진지로 돌아갔는데 연대 참모가 먹을 것을 잔뜩 갖고 왔는데, 생존한 5명이 어떻게 그 많은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겠나"라고 말했다.

최득수 6.25참전용사.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최득수 6.25참전용사.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최 옹은 6.25전쟁의 정전협상이후 전역해 미군 8군 특수부대 공작선 정비공으로 일을 하다가 퇴직했다. 특히 군 전역 이후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 학교를 다니며 안보, 호국 강연에 힘을 쏟았다. 군 입대를 꺼려하는 젊은 청년들을 꾸짖으며 자신의 무용담을 후배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30년 전 처음 강연을 했던 최 옹은 지난해 마지막으로 부사관학교를 찾아가 후배들에게 자신의 6.25 경험담을 들려줬다. 부사관학교에서는 지난해 최 옹의 흉상을 만들어 최 옹의 6.25전쟁 공로를 기리고 있다.

고령에 거동이 불편한 최 옹은 더 이상 안보·호국 강연을 다닐 수 없지만 여전히 전후 세대들에게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군 입대를 기피하는 청년들에게 쓴 소리를 히고 있다.

"군 생활 안 한 사람들은 의지가 모자라. 나도 솔직히 전쟁 일어나서 그냥 끌려갔지만, 군 생활이라는 것이 배우는 것이 많아. 전쟁이랑 사회생활이 똑같아서 도망가면 소용 없어. 항상 뭉치고 싸워야해. 정신무장하고. 도망가면 안 돼."

'인터뷰'를 네이버에서 지금 바로 구독해보세요!
목용재 기자 (morkka@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목용재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