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소통과 페미니즘, 똑바로 들여다본 스웨덴


입력 2017.10.14 05:00 수정 2017.11.09 17:38        이석원 객원기자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6>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홍희정 박사

소통의 정치박람회 ‘알메달렌’ 속으로 직접 뛰어든 당찬 연구자

외교부의 2015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2789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스웨덴 스칸디니비아 정책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연구 중인 홍희정 박사 (사진 = 이석원) 스웨덴 스칸디니비아 정책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연구 중인 홍희정 박사 (사진 = 이석원)
1401년 태종은 윤조와 박전의 주청에 따라 경복궁에 송나라 등문고를 본 따 신문고를 설치한다. 백성의 억울함을 왕이 직접 듣겠다는 취지다. 조선이 왕의 나라가 아닌 신하의 나라임을 강조했던 정도전을 죽인 태종은 왕이 백성과 직접 소통하는 정치를 꿈꿨을까? 아무튼 신문고는 지금까지도 소통 정치의 상징물이다. 적어도 600년도 더 전에 우리 조상 정치인들은 그런 노력을 기울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실제 활용이나 효용성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소통은 가장 보편적인 정치 용어가 됐다. 지난 정부 내내 ‘소통’과 ‘불통’은 각 정치 진영에서 상대방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가장 큰 무기였다. 그리고 지금도 소통은 정부나 다른 정파를 비판하는 날선 검이 되기도, 견제를 피해가는 튼튼한 방패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당분간 한국 정치에 있어서 소통은 양날의 검이 돼 정치인 입에서 가장 많이 표출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 그 소통의 정치의 ‘진짜배기’가 있다. ‘대화’ 와 ‘합의’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덕목으로 생각하는 스웨덴의 자랑거리 ‘알메달렌(Almedalen)’이다. 대의 정치를 하면서도 직접 민주주의 강력한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는, 그야말로 정치와 시민이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는 공간이 ‘알메달렌’이다.

“‘알메달렌’은 정치인과 일반 대중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정치 현안을 논의하고 그것이 곧 스웨덴의 주요 정책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입니다. ‘알메달렌’은 정당의 중요한 소통 통로로 부상되면서 국민들도 휴가기간 동안 자유로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정치 현안을 논의하는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현재 스웨덴에서 스웨덴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복지 정책과 성 평등, 그리고 스웨덴 모델이라고 부르는 시스템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는 스칸디니비아 정책연구소 홍희정 박사(36)는 ‘알메달렌’에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참여해 본 몇 안되는 한국사람 중 하나다. 매년 7월 초 스웨덴에서 가장 큰 섬이자 대표적인 휴양지인 고틀란드의 알메달렌이라는 공원에서 일주일 간 열리는 이 정치 박람회에 홍 박사가 참여한 것은 지난 해. 한국인으로는 처음 부스를 설치하고 학술 세미나를 열었다.

홍희정 박사는 특히 스웨덴의 정치박람회인 알메달렌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해왔다. (사진 = 이석원) 홍희정 박사는 특히 스웨덴의 정치박람회인 알메달렌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해왔다. (사진 = 이석원)

‘알메달렌’은 1968년 당시 교육부 장관이자 차기 수상 내정자였던 울로프 팔메 전 총리로부터 시작됐다. 고틀란드에서 휴가를 보내던 팔메는 갑자기 트럭에 올라가서 시민들에게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이것이 전국 신문에 소개됐던 것이다.

“팔메의 즉흥 연설은 국민과 정치인이 직접 만나 정치를 논하는 장으로 승화되었죠. 이렇게 시작된 알메달렌 주간은 70년대에는 팔메 수상이 주로 참가하고 1~2개 정당으로 확대되다가 1982년부터 스웨덴의 거의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정치인 주간 혹은 ‘알메달렌 주간(Almedalveckan)’이라는 명칭으로 정치박람회의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홍희정 박사가 스웨덴의 복지나 정책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된 큰 이유 중 하나도 ‘알메달렌’이다. 그는 2013년 이화여대 박사 과정일 때 장학 프로그램 일환으로 처음 스웨덴에 왔다. 홍 박사는 6개월 간 박사 학위 논문을 위한 자료 수집을 마치고 학위를 받은 후 한 연구 기관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홍 박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연구와 관련해 명확하고 무한한 미래가 있다고 느껴진 스웨덴으로 2016년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계정치사에서 기념비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진정한 소통 정치의 상징이 된 ‘알메달렌’에 직접 참가하게 됐다.

“‘알메달렌’은 1982년부터 전국 규모의 이익단체, 노조, 시민단체, 학계 등이 참여하면서 정치 세미나 형태로 발전했죠. 하루 한 정당씩 정책설명회를 통해 당수와의 만남, 정책에 대한 국민과의 직접 소통, 문화 행사 등을 진행하며 축제의 모양을 갖춥니다. 2000년 이후 연평균 10만 명 이상이 참가하고 1000여 개 이상의 세미나와 정당인과의 대화,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세미나, 학계 및 연구소의 연구결과 발표 등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각 당에서 유럽 및 북미 등에서 각계 인사를 초청하는 등 국제적인 행사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거리 연주, 연극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함께 진행되면서 민주주의 축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6년 7월 스웨덴 고틀란드 시청 회의실에서 뵌 얀손(Björn Jansson) 고틀란드 시장과 고틀란드 및 알메달렌 관련한 인터뷰를 하고 있는 홍희정 박사. (사진 = 홍희정 제공) 2016년 7월 스웨덴 고틀란드 시청 회의실에서 뵌 얀손(Björn Jansson) 고틀란드 시장과 고틀란드 및 알메달렌 관련한 인터뷰를 하고 있는 홍희정 박사. (사진 = 홍희정 제공)

홍 박사가 목격했던 소통의 정치는, 정치인들이 판을 깔아놓고 시민들이 들러리 세워지는 이벤트가 아니었다. 100살 먹은 노인부터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유치원생까지 사회민주당이든 보수당이든 좌파당이든 당수를 앉혀놓고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으며 정치와 시민이 하나로 합쳐지는 축제의 장이었던 것이다. 스웨덴의 휴가가 시작되는 시점에 인구 1000만 명이 채 안되는 스웨덴에서 연인원 10만 명이 모인다는 것은 가장 뜨거운 열광이었던 것이다.

이미 ‘알메달렌’은 스웨덴을 넘어섰다. 스웨덴과 함께 노르딕 5국에 속한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도 ‘알메달렌’을 벤치마킹했다. 서울도 뛰어들었다. 박원순 시장은 2016년과 2017년 연속으로 서울 광장에서 ‘알메달렌’을 벤치마킹한 정치박람회 형태의 정치 축제를 열었다. 경기도와 제주도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유의미한 수준이 아니다.

“‘알메달렌’ 본래 의미인 소통의 장으로써의 역할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여요. 단기간에 ‘알메달렌’을 재현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미 성숙한 ‘알메달렌’을 무리하게 따라하기보다는 비록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의회 등의 주도로 자리 잡고 있는 북유럽 사례를 벤치마킹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 박사가 스웨덴에서 연구하는 것은 ‘알메달렌’만은 아니다. 홍 박사의 전문 분야가 양성 평등이다. 그래서 스웨덴은 홍 박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연구의 장인 것이다. 스웨덴은 사실 성 평등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하다. 여성에 대한 관점도 배려와 평등 추구가 아니다. 심지어는 제3의 성이라고 얘기하는 ‘중립 성’도 배려의 대상이 아닌 그냥 인간의 문제인 것이다. 생물학적, 또는 심리적 성의 정체성 자체가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스웨덴의 발상이다. 스웨덴은 대내외적으로 페미니즘 정부를 표방하지만, 페미니즘이 여성 우선의 사고가 아닌 인간 본연의 사고라는 게 스웨덴의 사고방식이다.

홍 박사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국가 경제, 사회의 빅 이슈 등이 논의 되고 난 이후 성 평등에 대해서 별도로 논의하지만, 스웨덴에서는 어떤 정책이든 가장 먼저 성 인지(性 認知)적 관점이 반영되었는지부터 논의한다”고 말한다. 성 평등은 별도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정책 속에 처음부터 녹아 있어야 되고, 페미니스트 정부인 스웨덴이 우리나라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2016년 11월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에서 당시 스웨덴을 방문한 한국 정치인 및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모습. (사진 = 홍희정 제공) 2016년 11월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에서 당시 스웨덴을 방문한 한국 정치인 및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모습. (사진 = 홍희정 제공)

홍 박사는 지난 해 스웨덴의 정부업무 성과관리제도,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정당정치자금 제도에 관한 보고서를 썼다. 올해는 스웨덴 복지 정책에 관한 사례연구를 진행하면서 서울복지재단에 매달 기고하고 있는데, 올해 말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그리고 최근 ‘알메달렌’ 연구를 진행하면서 국내에서는 드물게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곧 ‘스웨덴 알메달렌의 경제적 효과 분석을 통한 지역 축제 성공방안 모색’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학술지에 게재될 예정이다. 그리고 스웨덴 고틀란드에서 발행한 자료집이 번역을 마치고 11월 중 출판된다. 이와 함께 스웨덴 통계청에서 발행한 성 평등 통계집도 12월쯤 번역 후 출판될 예정이다. 그야말로 1년 반의 연구 성과를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셈이다.

소통은 특정한 정치인들의 전가의 보도가 아니다. 불신이 내뱉는 상투적인 욕지거리도 아니다. 소통은 정치가 정치다울 수 있고, 시민이 시민다울 수 있고,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다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이자 갑주다. 스웨덴 민주주의와 복지의 한복판을 누비고 있는 홍희정 박사의 이런 연구들은 고스란히 한국의 정치와 사회가 불통을 극복하고 소통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거친 자갈들을 치우고 매끈한 유럽식 돌바닥을 만드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이석원 기자
기사 모아 보기 >
0
0
이석원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