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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아나운서의 안경에 흔들린 세상


입력 2018.04.14 08:18 수정 2018.04.14 09:13        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닭치고tv>안경 쓴 것이 외모 관리에 무성의한 것으로 간주되는 편견

임현주 MBC 아나운서가 지상파 뉴스에서 처음으로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해 화제다.MBC 방송 화면 캡처 임현주 MBC 아나운서가 지상파 뉴스에서 처음으로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해 화제다.MBC 방송 화면 캡처

아침 뉴스 앵커인 MBC 임현주 아나운서가 안경 쓰고 뉴스를 진행해 화제가 됐다. 안경 쓴 정도의 일이 화제가 된 이유는, 이것이 지상파 방송사 최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남성이 안경 쓰고 뉴스를 진행한 적은 종종 있었지만 여성은 없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파업 때 중견아나운서인 유애리 아나운서가 안경 쓰고 뉴스를 진행한 적이 있지만 파업으로 인한 대체라는 특수 상황이었다. 종편에선 JTBC 강지영 아나운서가 시사프로그램인 ‘5시 정치부 회의’에 안경 끼고 등장한 적이 있는데, 전체 뉴스 진행이 아니라 한 코너의 진행이었다.

안경은 현대에 매우 보편화된 도구다. 그런데 그것을 여성 뉴스 진행자가 쓴 적이 없다는 것이 놀랍다.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안경 금기가 존재했던 것이다. 임현주 아나운서가 금기를 깼다.

임 아나운서는 눈이 안 좋아 속눈썹 붙이는 화장이나 렌즈 끼는 것이 불편했다고 한다. 아침 뉴스 진행하느라 아주 이른 새벽부터 바쁘게 준비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화장하고 렌즈 끼는 데에 시간을 쓰는 것도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그동안은 암묵적인 규칙을 지켰지만 이젠 ‘오랜 시간 고민하다 용기를’ 내 ‘여자 앵커들도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할 수 있단 걸 보여주고’자 마침내 안경을 썼다는 것이다. 안경을 쓰고 나니 ‘왜 안경을 썼어?’라는 인사를 하루 종일 받았다고 한다. 충격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드라마에서 외모가 뛰어나지 않던 여주인공이 예쁘게 변신하는 설정이 나올 때, 뛰어나지 않은 외모를 상징하는 소품이 바로 안경이다. 안경을 썼던 여주인공이 안경을 벗은 후 슬로우모션으로 등장하면 남주인공이 깜짝 놀라 넋을 잃고 바라보는 설정이 흔히 등장한다.

이걸 보면 안경과 여성의 외모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안경을 쓰지 않아야 예쁘게 잘 꾸민 여성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안경 쓴 것이 외모 관리에 무성의한 것으로 간주되는 편견이다.

남성에게 적용되지 않는 안경 금기가 여성에게만 있었다는 것은 여성에게 외모에 대한 강력한 압박이 있었다는 뜻이다. 드라마에서 안경 벗고 미인이 된 여주인공처럼 여성 뉴스 진행자도 안경 벗고 예쁜 모습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압박 말이다.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외모지상주의다. 남성은 능력, 여성은 외모라는 편견이 안경을 통해 작동했던 것이다. 주로 무채색이나 무거운 색깔의 신뢰감 주는 의상을 입는 남성 앵커에 비해 여성 앵커는 옷도 화사한 색감일 때가 많다. 여성 앵커를 화면을 예쁘게 장식하는 화사한 꽃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남성 앵커와 여성 앵커 사이의 나이 차이도 크게 날 때가 많다. 그리고 남성은 연륜이 쌓이면 더 안정감 있게 자리를 지키지만 여성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체되는 경우도 많다. 여성 진행자의 교체주기가 훨씬 짧은 것이다. 이것도 여성을 화사한 외모 중심으로만 보는 편견과 연결된다.

뉴스 말미에 등장하는 일기예보도 과거엔 중견 기상 전문가가 했었지만 요즘은 화사하게 차려입은 젊은 여성에게만 시킨다. 의상이 여성의 몸매를 강조하는 디자인인 경우가 다반사다. 이것도 한국 뉴스가 여성을 보는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안경은 지적인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여성은 지적이고 날카로워 보여선 안 된다는 편견이 있다. 과거 국회의원이 여성 후보자들에게 ‘여자는 똑똑해보이면 안 된다’고 강연해 화제가 됐었다. 여성은 화사하고, 순종적이거나, 귀엽거나, 섹시한 존재이지 지적인 존재가 돼선 안 된다는 편견. 이것도 안경 금기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세상이니 임현주 아나운서가 안경 벗고 뉴스에 등장하자 화제가 된 것이다. 임현주 아나운서는 안경을 내려놓음으로서 여성을 꽃으로만 보는 구체제에 작은 균열을 냈다. 이것으로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진 않겠지만, 최소한 여성 진행자들이 건조한 눈에 눈물 넣어가며 억지로 렌즈 끼고 카메라 앞에 서는 관행이 조금은 흔들리게 됐다.

글/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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