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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혁명주의자인가


입력 2018.10.15 07:00 수정 2018.10.15 06:13        데스크 (desk@dailian.co.kr)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 김정은 이미지 관리사 역이라니

북한 현 체제론 정상국가 불가능…테르미도르의 반동을 기억해야

<이진곤의 이건 아니지요> 김정은 이미지 관리사 역이라니
북한 현 체제론 정상국가 불가능…테르미도르의 반동을 기억해야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지난 9월 20일 삼지연초대소에서 오찬을 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지난 9월 20일 삼지연초대소에서 오찬을 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올해 노벨평화상이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에게 주어지리라는 기대가 잠깐이긴 했지만 언론을 달구었다. 타임지가 3일(현지시간)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들어 노벨평화상 유력한 수상 후보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가장 먼저 꼽힌다”고 보도한 것을 계기로 지지자들의 기대감은 급팽창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공로로(물론 그의 민주화 투쟁 경력도 감안되었다지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래 우리나라 대통령이 이 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국민 사이에 확산됐다. 그 이후 오히려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더 집착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우리는 물론 국제사회에 공포감을 안겼지만 노벨평화상은 포기되지 않았다.

김정은 이미지 관리사 역이라니

노 전 대통령이 임기 만료를 두 달 여 앞두고 기어이 평양행을 강행했던 것을 ‘평화에의 염원’으로 못 봐줄 까닭은 없다. 그러나 “남북관계만 잘 되면 다른 것은 다 깽판쳐도 된다”고 했던 그의 인식 한 가닥이 노벨평화상에 이어지지 않았으리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노벨상은 충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어떨까? 언론 여기저기 예측되고 단정까지 되는데 마음에 동요가 없다면 그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올해 평화상 수상자가 콩고의 의사인 드니 무퀘게(63)와 이라크 북부 니네베주에 살던 야디지족 출신인 여성 인권운동가 나디아 무라드(25)로 확정된 후 다소간에 실망했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노벨평화상은 인류의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과 업적을 올린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게 일반인의 상식이다. 그런데 정작 심사해서 주는 측의 선정 원칙은 좀 더 다양해 보인다. 지난 2009년 10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한 후 토르뵤른 야글란 노벨 위원회 의장은 “핵 없는 세상에 대한 오바마의 비전과 업적을 특히 중시했다”라고 밝혔다. 이해할만한 공적이긴 했지만 당시 오바마는 취임한지 9개월에 불과했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지 야글란은 “그동안 노벨 평화상은 수상자가 하고자 하는 바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선정한 경우가 다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니까 이 상은 정치적 판단에 따라 주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겠다. 그 때까지의 업적이 아니라 향후 기대되는 업적까지 감안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다른 부문의 상은 결과에 대해 주어지는데 이 상은 결과 경과 예상 등에 대해 주어지는 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하겠다. 그 때문에 이 상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한국 대통령들의 노벨평화상을 향한 마음은 더 바빠질 듯하다.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한 ‘평화 업적’을 쌓거나 ‘평화 의지’를 과시할 기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꿈을 꾸는 것이야 나무랄 일이겠는가. 그런데 그 목표에 구애되어 김정은을 미화하는 일은 제발이지 말아줬으면 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에 대해 “아주 젊지만 이 가난한 나라를 발전시켜야겠다는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며 “또 아주 예의바르고, 솔직담백하면서 연장자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아주 겸손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한 것으로 언론들이 전했다.

북한 현 체제론 정상국가 불가능

4‧27판문점 회담 후부터 문 대통령이 한 말이지만 외국 언론에까지 김정은의 이미지 관리인을 자처한 것은 지나친 친애의 과시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모부를 고사총으로, 친형을 독가스로 살해한 것이 연장자에 대한 대접인가. 당‧정‧군 간부, 민간인 가리지 않고 공개처형을 자행하는 것이 겸손한 리더십인가. 잘못된 정보를 대통령의 이름으로 제공하는 것은 북한 정치체제의 기형성에 대한 의도적‧음모적 은폐나 다를 바 없다.

문 대통령은 18일 바티칸을 방문, 프란치스코 교황과 단독 면담을 한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교황님이 평양을 방문하시면 열렬히 환영하겠습니다”라는 김정은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한다. 북한은 종교의 동토다. 김정은이 자기 외의 신을 인정하려 할 리가 없다. 그것은 북한 사이비 신정체제의 자기부정이 된다.

주민들을 동원해 열렬히 환영한 다음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할 것인가? 그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그게 아니라면 교황까지 알현하러 왔다, 따라서 김정은은 세계의 왕이고 신이라고 주민들을 속이려는 것일까? 만약 그걸 예상하면서 메신저 역할을 하고, 교황의 북한 방문을 권유한다면 이는 일국의 대통령으로서는 물론,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서도 심각한 일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과 북한체제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깊은 이해, 명확한 인식 없이 이런 심부름은 하지 않는 게 옳다.

문 대통령의 대단히 위태로운 발언은 이 뿐이 아니다. 북한의 인권 문제와 관련, 그는 “그 인권은 국제적으로 압박한다고 해서 증진의 효과가 바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가장 실질적으로 개선해 주는 방법은 남북 간의 협력, 그리고 국제사회와 북한 간의 협력, 그리고 북한이 개방의 길로 나와서 정상적인 국가가 되어 가는 것, 이런 것들이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빠르게 개선하는 실효성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같은 처방도 내 놓았다.

북한 정권의 인권탄압이 우리와 국제사회의 대북 협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투다. 북한의 폭정은 체제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립 초기부터 1인 종신 집권과 세습 전제군주제를 기도하고 강행한데서 체제의 기형성이 생겨나고 부풀었다. 극단적 독재국가는 개방하는 순간 무너지고 만다. 정상국가란 정상적 체제와 법제, 그리고 상식적 리더를 갖췄을 때 가능하다. 김정은 지배 하에서 북한이 정상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다.

북한의 인권상황은 참혹하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여유롭기 그지없다. 조금씩이라도 숨통을 틔워주는 게 급선무다. 그 점에서는 국제적 압박이 효과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문 대통령은 우선 북한 체제를 지원해서 스스로 변하게 하면 언젠가 인권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식의 여유를 부리고 있다. 이건 북한 주민에겐 해법이 아니라 악담이고 저주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기억해야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혁명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 2004년 12월 5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교민들과 간담회를 가졌는데, 여기서도 혁명 예찬론을 폈다. “인류가 발명한 역사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게 나는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혁명이다. 인간이 부닥쳐 있는 문제 중에 인간이 인간을 지배 복종 수탈하는 관계가 가장 큰 문제인데,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우고 성공한 혁명”이라고 역설했다.

프랑스혁명은 피로 얼룩졌다. 도처에서 학살이 자행됐고, 처형 대상자가 너무 많아 기요틴이라는 효과적 단두대를 고안해야 할 정도였다. 마침내 혁명은 자코뱅파의 두 거두,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까지도 기요틴의 먹이로 던져줬다. 혁명이 자식까지 삼켜버린 것이다. 그런 이면을 가진 프랑스혁명에 노 전 대통령은 매료되었다. 그 기분으로 그는 기회 있을 때 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시민혁명이라고 강조해 마지않았다.

13일 역시 파리에서 교민 간담회를 가진 문 대통령도 노 전 대통령처럼 혁명예찬론을 펼쳤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은 인류의 마음속에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새겨 넣었고 21세기 우리의 촛불혁명은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냈으며 위기에 빠진 세계 민주주의에 희망이 되었다.”

대단한 사자후다. 그는 촛불집회를 촛불혁명으로 격상시키더니 어느새 프랑스혁명의 반열에 올렸다. 과거 노 전 대통령이 시민혁명을 프랑스혁명과 등치시킨 그 화법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한국의 촛불혁명이라는 것이 마침내 세계의 민주주의를 구해냈다고 선언했다.

그도 광화문 촛불집회 때 군중들이 끌고 다녔던 기요틴을 봤을 것이다. 효수되어 기중기에 높이 걸린 현직 대통령의 얼굴 그림을 못 봤을 리가 없다. 공포감을 주는 횃불부대가 청와대로 행진하는 장면인들 목격하지 못했을까.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혁명이었다고 했다.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을 ‘예의바르고 솔직담백하며 겸손한’ 젊은이로 치켜세웠으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민주파괴자로 몰아세운 것이다.

이 어지러운 언어의 혼란과 모순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민주주의에 관한 한 유럽은 우리보다 훨씬 오랜 경험과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거기 가서 혁명과 민주주의를 설파하겠다는 것인가. 갈수록 문 대통령의 언어에 자기 미화와 독선이 짙게 배어들고 있다. 자기성찰과 반성이 수반되지 않으면 오만을 초래한다. 폭주하는 권력은 결국 자신을 덮치고 만다. 테르미도르 반동을 잊지 말 일이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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