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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이 사랑했던 동궐의 비극

    [데일리안] 입력 2006.10.1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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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한영우의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우리는 종종 역사를 시간성의 영역에만 묶어둔다. 그렇게 추상의 영역으로 들어선 역사는 연대순으로 조직된 사건의 나열로만 구체화될 뿐, 이미 현실에는 자리하지 않는 존재로 탈색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 역사 역시 시·공간의 영역에 존재한다.

특히 공간으로서의 역사는 시간과 직접 맞부딪친 상흔을 두려움 없이 드러낸다. 파괴되고 낡은 모습으로, 때론 ‘부재不在’ 그 자체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는 관념의 영역에 머물던 역사를 ‘동궐(東闕, 창덕궁과 창경궁을 모두 이르는 말로,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해 붙은 이름이다)’이란 현장으로 불러낸 책이다.

조선 왕조사 연구의 권위자 한영우 교수와 우리 문화재 촬영에 일생을 바친 사진가 고故 김대벽 선생이 함께했으며, 열화당과 효형출판이공동 제작했다. 일반인이 쉽게 닿을 수 없는 공간까지 카메라로 담아내고, 사라진 건물은 〈동궐도(東闕圖, 국보 제249호)〉를 통해 되살렸으며, 〈동궐도〉 전경을 덧붙여 옛 지도를 들고 직접 궁궐을 찾을 수 있게 했다.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최근 일반에 공개된 후원後苑을 누비는 이 역사 기행은 결국 이곳에 “수많은 생령들이 우리처럼 먹고 자면서 살고 갔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많은 사람이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을 꼽지만, 정작 국왕들이 가장 오랫동안 머문 장소는 바로 창덕궁과 창경궁이다. 경복궁이 정궁正宮이기는 했으나, 태종의 ‘왕자의 난’이 일어난 비극의 무대였으므로, 후대 왕들은 그곳을 기피했다.

또 북쪽의 백악산白岳山과 서쪽의 인왕산仁王山에 노출된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과 창경궁은 깊은 숲에 가려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후원 덕분에 왕족의 집으로 더 사랑받았다.

이렇게 조선 왕조의 중심지였던 동궐에서는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우선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을 지나 인정문仁政門으로 향해보자. 이곳은 임금의 즉위식이 치러진 공간으로, 연산군을 비롯하여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여덟 임금이 왕이 되었다.

즉위한 공간은 같았으나, 그 뒷모습은 사뭇 달랐다. 반정反正으로 쫓겨난 이가 있는가 하면, 역대 왕 가운데 가장 오래 재위한 이도 있고, 망국의 과정을 직접 지켜봐야 했던 이도 있다.

지금은 사라져 <동궐도〉로만 확인할 수 있는 궁도 있다. 바로 중희당重熙堂으로 창덕궁의 건물 가운데 가장 크고 멋들어졌으며, 넓은 마당에는 풍기風旗, 해시계, 측우기까지 놓여있었다. 정조가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한 중희당에는 과학을 중시하고 조선의 문예 부흥을 이끈 그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다.

다음은 성종의 효심이 탄생시킨 궁궐, 창경궁으로 가보자.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은 출입을 위한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임금이 일반 백성과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 이곳에서 몸소 백성의 의견을 물었고,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해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직접 나누어주었다.

또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옆에 자리한 문정전文政殿은 사도세자의 목숨이 스러진 장소다. 이곳 앞뜰에서 스물여덟의 세자는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한편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선에 자리했던 낙선재樂善齋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족이 머물렀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순종純宗이 통한의 세월을 보냈고, 영친왕英親王의 부인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89년까지 살았으며, 2006년 8월 작고한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의 빈청殯廳이 이곳에 세워졌다. 본래 국상國喪을 당한 왕후와 후궁의 처소로 사용되며 단청조차 하지 않은 이 검박한 집은, 망국의 슬픔에 찬 왕족의 마지막을 함께한 동반자였던 셈이다.

이제 동궐의 속살, 후원으로 향해보자. 북한산과 응봉鷹峯에서 뻗은 9만여 평의 이 왕실 정원에는 한때 100여 개 이상의 누각과 정자가 자리했으나, 현재는 누樓 열여덟 채, 정자 스물두 채만이 남아있다.

유독 정자의 규모가 작고, 시골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가草家와 농막農幕 형태가 많은 까닭은 자연 경관을 위압하지 않으면서 자연에 포근하게 안기려는 소박한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특히 후원의 북쪽 끝에 자리한 옥류천 일대는 널찍한 바위와 폭포, 정자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선경仙境을 연출한다. 그래서 이곳의 취한정에 머물던 숙종은 아름다운 봄밤에 취해 “온 뜨락의 꽃그림자는 봄밤에 머문 달이요, 정원 가득한 솔 소리는 밤에 듣는 파도라네.”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인 떠난 옛집에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는 이 기행이 책으로 묶이기 직전, 동궐 곳곳을 프레임 속에 담아내던 김대벽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2006년 9월 18일).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우리를 슬픔으로 이끌지만, 그의 마지막 사진들은 여전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소멸의 숙명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추억하는 이가 있는 한 영원을 기약할 수 있다고.

이제 역사의 시·공간 속에 진정한 ‘조선의 집’으로 되살아난 동궐에 들면,자식을 기르고 부모를 공양하며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삶을 살아가던 왕족 일가뿐 아니라, 투병 중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던 그의 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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