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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데일리안] 입력 2006.10.20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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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이청준의 <머물고 간 자리 우리 뒷모습>

이청준 산문집 『머물고 간 자리, 우리 뒷모습』이 출간되었다. 이 산문집은 2000년 들어 매년 한 해의 끝과 시작 즈음에 쓴 산문을 가려 엮은 것으로, 40여 년을 문학에 매달려 온 작가의 세상살이에 대한 회고와 문학에 대한 감회가 진솔하게 담겨 있다.

이 산문집은 네 장으로 구성되었다. 문학 작품을 둘러싼 담론 위주의 글과 작가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의 가치와 의미를 통찰한 글, 그리고 정보화 시대와 물질 중심 사회의 세태를 꼬집은 시사적인 글, 그리고 이미 출간된 몇몇 작품들에 대한 두 편의 짧은 산문이 그것이다.

“소설은 우리 삶을 모방해 베끼는 일이며,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일은 작가가 지난날의 제 삶을 소설로 한 번 더 살아 내는 일??이라는 고백처럼 이청준의 소설 작업과 삶에 대한 진솔한 뒷이야기들에는 배격보다는 감싸는 것의 미덕, 그리고 홀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사랑과 애정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세상살이의 결핍과 부족함을 너그럽게 채우고 감싸 안으려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정이 메말라 가는 요즘 삶의 팍팍한 풍경과 겹치며 애잔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를 웃기는 삶의 허방
소설 속 사랑의 삼각 구도가 오늘날 여성 상위로 바뀌었음을 지적하고, 1950년대 소설 속 여주인공의 가련한 인생 때문에 하굣길 변사 노릇을 하며 울분을 달랬던 작가의 추억담, 탈가치를 지향하며 역방향 방색 시선을 보여 주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 미덕, 소아마비를 앓았던 돌아가신 누이와 중학교 때 한쪽 팔이 없었던 선생을 추억하며 자기 육신의 결핍을 자연스럽고 대범하게 감싸 안았던 인물들에게 보내는 동경, 오랫동안 문학상을 심사해 오면서 따스한 문학적 정서와 유대와 공유감이 결핍되어가는 문학상 자리에 대한 아쉬움 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아직 씌이지 않아 마음속에서 종주먹질을 하고 있는 인물들과 그들 때문에 소설 쓰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작가의 소명 등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아마 그 시절엔 아직 분명한 생각이 아니었겠지만, 자기 육신의 결핍을 자연스럽게 감싸 입은 그 선생님의 두루마기 차림이 누구 못지않게 보기 좋고 곱게 느껴졌던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자기 삶의 결핍을 채워 가꾸는 데도 그렇듯 여러 길이 있을 수 있고, 더러는 그로 하여 그 삶이 더욱 존엄해질 수도 있음이 아닌가. -<아름다운 두루마기의 기억> 중에서

하지만 들볶임과 시달림 끝에 제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나면 그 인물들은 대개 마음속에서 사라져 떠나가게 마련이어서 더 이상 문제가 될 게 없다. 이보다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소설 쓰기 올해로 40년을 넘기면서 이제는 심신이 피로하고 낡아 가는 느낌에 가당찮은 긴장기를 좀 놓고 지냈으면 싶은데, 아직도 속에서 종주먹질을 해 대며 사람을 들볶아대는 몹쓸 ‘인물들??이 적잖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씌이지 않은 인물들의 종주먹질> 중에서

부끄러움,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전쟁 통에 자신을 감싸 안고 죽은 어미의 무덤을 찾아가 입은 옷을 모두 벗어 무덤을 덮어 주고 해외로 입양되어 간 소녀의 이야기, 2, 30대 시절 돌아갈 보금자리와 가족간의 훈훈한 사랑이 못내 부러워 궁핍한 형편에도 하숙집에 손 선물을 들고 들어갔던 추억, 월출산 무위사에 내려오는 유서 깊은 설화를 소개하며 예술과 삶의 불완전성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던 옛 선인들의 지혜.

평소 친분 있는 스님에게 돈봉투를 받고 돌아와 깨달은 신세지는 삶, 갚을 것이 많은 삶의 풍요로움, 추석 때면 가난하고 남루한 아이들을 위해 밤나무를 심었던 옛 어른들의 마음을 추억하며 무너져 가는 우리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 밤 산길의 독행자처럼 긴 세월 제각기 자기 밤 산길을 외롭게 지나온 동료 문우들에 대한 애정 등이 진하게 녹아 있다.

그런데 먼 이국 길을 떠나기 전 선교사의 배려에 따라 아이가 마지막으로 제 엄마의 무덤을 찾아가 하직인사를 드리던 날이었다. 그 날도 겨울 날씨가 쌀쌀하기 그지없는데, 아이 혼자 언덕 너머 제 어미 무덤으로 올려 보낸 선교사가 아래 쪽 길가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내심 이상히 여긴 그가 언덕을 올라가 보니 아이는 그 차가운 바람기 속에 자기 옷을 모두 벗어 엄마의 무덤을 꼭꼭 싸 덮어 주고 자신은 발가벗은 몸으로 하염없이 그것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이었다…… -<부끄러움,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중에서

하지만 다른 한편 그 시절 사람들의 그 궁상스런 가장 흉내질 속엔 어쩌면 흉내 아닌 제 가족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믿음과 사랑이 깃들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 그 수많은 언덕 위의 불빛들이 그렇듯 따스하고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던 듯싶다. 그 결핍과 부재가 낳은 간절한 믿음과 사랑. 그 창문들은 어두운 세상을 향해 그것을 이야기하고, 내게도 어떤 훈훈한 소망에 젖게 해 주었으리라. -<따뜻한 영혼의 눈빛> 중에서

그것은 내 삶의 기억이 지나치게 메마르고 척박해지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 최면풀이 같은 것이었다. 한 마디로 누구에게 아무 것도 신세를 진 일이 없는 삶이라니! 그래서 아무 것도 갚을 일이 없는 삶이라니! 제 이웃에 무엇을 베풀지 못한 삶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그 이웃에게 아무 것도 신세를 진 일이 없는 삶, 그래서 아무 것도 되갚을 일이 없는 삶 또한 못지 않게 각박하고 초라하고 적막한 꼴이 아닐 것인가. -<신세 질 줄 아는 삶> 중에서

머물고 간 자리, 우리 뒷모습
우리 삶의 외형적 제도는 많이 나아졌으나 개개인의 삶의 질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금연?? 캠페인을 통해 본 글, 실제 우리 사회의 강자들이 그 떳떳하지 못한 강자의 위상 노출을 꺼려 짐짓 약자연하며 위장하는 힘의 역소외 현상에 대한 일침, 신지식인이 대두되면서 우리 영혼을 실은 삶 중심의 정보 생산은 뒤처지고 물질적 정보의 유통만이 확산되고 있는 요즘 세태에 대해 우려하면서 아파트 경비원의 이야기를 통해 혼이 실린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

실실치 못하고 어리석은 행티를 일삼았던 온전치 못한 마을 광인과 말썽꾼들을 함부로 허물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던 어른들의 오불관언식 침묵과 관용의 지혜를 통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에서 공동의 피해자나 패자가 되지 않는 길은 그뿐이라는 깨달음, 1982년 당시 88올림픽 유치와 겸하여 한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성급하게 추진하려고 했던 관계 기관의 처사를 유쾌하게 비꼬며 준비하고 기다리는 지혜를 강조한 글 등이 담겨 있다.

지난 가을 입주해 들어간 우리 신축아파트 동네에는 쓰레기가 넘쳐났다. 더러는 남의 눈을 피해 야간을 이용하여 규정 밖의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던지고 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런데 젊은 경비원 한 사람이 밤낮 가리지 않고 그 쓰레기들을 일일이 다 한 곳에다 추려 정리했다.

주간근무 때면 저녁 교대시각 전까지, 야간근무 때면 밤사이에 내다 버린 쓰레기들을 새벽부터 아침까지 깨끗이 정리해 두고서야 주간 근무자와 자리를 바꿔 퇴근했다. 사람이 떠나갈 때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댔다.

그 뒷모습이 아름다우려면 그가 머물다 떠나간 자리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야 함이 물론이다. 그러니 그들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머물고 간 자리, 우리 뒷모습> 중에서

어찌 보면 그 자체가 무책임하고 불의해 보일 일이었다. 하지만 오랜 뒷날 나는 나름대로 그 오불관언식 침묵과 관용의 지혜를 이렇게 읽어볼 수 있었다. -세상이 다 옳은 길뿐이고 착한 사람뿐이라면 오죽 좋으리. 세상이 어차피 그렇지 못할 바엔 서로가 참고 헤아려가며 함께 살아가는 길밖에. 저들인들 그렇게 태어나기를 바랐거나, 그렇게 살기를 원할 리가 없는 이치고 보면. -<자애의 역사> 중에서

그래저래 나는 때로 주위 친지들이 덕담 삼아 ‘자네 언제 노벨상 받을 거여. 어서 대작을 써서 좋은 소식 전해야지!´ 하는 따위 허물없는 농투에도 속이 물리고 가려워, 요즘 들어선 차라리 이런 자조섞인 대꾸를 서슴지 않게 된다. -나 벌써 그 상 받았는데! 자네 아직 그 소식 못 들었어? -<준비하고 기다리는 지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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