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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신간>“실천 불가능한 정의인가, 실천 가능한 치?

    [데일리안] 입력 2007.05.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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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남한산성(南漢山城)’ - ‘명분(名分)과 ’실리(實利)‘의 논쟁

소설 ´남한산성´의 표지소설 ´남한산성´의 표지
소설가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난 후, ‘죽어서도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라는 ‘명분(名分)’과 ‘실리(實利)’ 싸움에서 어떤 선택의 기로(岐路)를 택했느냐를 생각케 한다.

능양군(綾陽君)에서 반정으로 임금에 오른 인조가 청(靑)의 대군을 맞아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동안 남한산성으로 옮겨와 ‘성(城)안에 갇힌 국가(임금)’의 무기력 앞에서 주전파(主戰派) 김상헌과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측간의 말과 말의 싸움 즉, 명분과 실리를 극명하게 조명하고 있다.

“몸이 성 안에 갇혀 있으니 글로써 성문을 열고 나가야 할진대, 창검이 어찌 글과 다르며, 몸이 어찌 창검과 다르겠느냐...”(김상헌,121~122쪽)

“지킴으로서 내실을 돋우고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도 열릴 것이며,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화(和), 전(戰), 수(守)는 다르지 않사옵니다”(김상헌,141쪽)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 전(戰)이고,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지키는 것이 수(守)이며, 화해할 수 없는 때 화해하는 것은 화(和)가 아니라 항(降)이오”(최명길,142쪽)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진대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최명길,141쪽)


소설 ‘남한산성’에서 주전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대화에서 명분과 실리가 첨예하게 충돌한다.

“서날쇠가 눈 위에 끓어앉아 김상헌에게 큰절을 올렸다. 김상헌이 땅에 엎드려 맞절로 받았다. 예조판서의 머리와 대장장이의 머리가 닿을 듯이 가까웠다”(232쪽)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산성에 갖힌 조정(朝廷)은 무기력했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백성들의 고통은 물론 성밖에 임금의 ‘격서(檄書)’를 내보낼 사람이 없어 당시의 천민(賤民)출신 대장장이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겨야 했던 참담함과 치욕(恥辱)스런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

소설 ‘남한산성’을 읽으며 “가야겠구나. 가자”라며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에 이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떠나고, “황은(皇恩)이 망극(罔極)하오이다”며 청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조선의 16대왕 인조(仁祖. 1623~1649)와 그 시대의 상황을 되짚어 보는 기회도 가졌다.

***

1623년(광해군 15년) 광해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반정을 일으켜 능양군(綾陽君)에서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는 새로 부상하는 후금(後金)의 요동정벌에 조선이 참여해 물리칠 때만 즉위를 승인하겠다는 명(明)나라 때문에 즉위 초기에도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주청사(奏請使)의 정사로 명나라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기 위해 죽천 이덕형(竹泉 李德泂. 1566~1645)이 연경(燕京)에서 갖은 외교적 수모를 겪은 기록인 ‘죽천행록(竹泉行錄)’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죽천행록에 따르면, 이덕형 공은 자금성(紫金城) 길바닥에 엎드려 손을 부비며 중국 고관 만나기를 청하자 모두 불쌍히 여겨 칭찬하기를 “조선에 충신이 있도다. 내일 도찰원으로 오라”하여 무수히 사례하고 파루(罷漏:통금해제시간)를 기다려 마을밖에 대령하여 곡절 끝에 고위관료를 만나게 됐으나 관아(官衙)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섬돌을 붙들고 애원한다.

한 대신이 소리질러 꾸짖으며 “변방의 적은 나라 신하가 우리의 존위를 범하지 말라. 들어 내치고 문을 닫으라” 하자 ”대조 모든 대신들은 적선하소서“하면서 섬돌을 붙들고 나오지 않으니...”

이런 애원과 뇌물공세로 인조의 즉위를 승인받고, 면류관(冕旒冠)과 곤룡포(袞龍袍)를 받는 순간 앞과 뒤에 용과 호랑이를 그려넣고, 해와 달이 없는 곤룡포로 명나라 관리로부터 조룡과 횡포를 당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한, 천안문 서쪽 습례정(習禮亭)의 팔각정에는 천자를 보기 전에 예를 익힌다하여 ‘황제만세만만세(皇帝萬歲萬萬歲)’라는 푯말을 세워놓고 조선사신이 오면 맨끝의 9품석에 서서 삼궤구고(三跪九叩:세 번 무릎을 끓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의 예를 연습시키는 굴욕을 강요받았다.

인조는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고수하다 1627년 청나라의 태종(홍타이.1626~1643)이 처들어오자 강화도로 피난갔다 정묘화약(丁卯和約)으로 형제의 의(義)를 맺어 환도(還都)했었다.

훼손된 ´삼전도비´훼손된 ´삼전도비´
이어, 1936년 병자호란때 청 태종의 2차 침입으로 남한산성으로 피난 · 저항하다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서울 송파 석천호수 부근)’에서 곤룡포대신 평민복장으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 예)’의 굴욕을 당하고 군신(君臣)의 의를 맺고 환도했으며, 화강암 거북상에 대리석의 ‘대청황제공덕비(높이 570㎝, 너비 140㎝)’를 세워야 했다.

이 비석에는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하게 된 이유와 조선이 청에 항복한 사실 등이 만주족 문자와 몽골문자(앞면), 한문(뒷면)으로 음각돼 오욕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이로 인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에 효종)이 인질로 잡혀 심양에 머물렸으며,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던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끌고가 처형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수 만명의 우리 백성들이 포로로 심양(沈陽:선양)으로 잡혀가 노예로 팔린 한민족의 한과 눈물의 역사이기도 하다.

***

“성이 열리는 날이 곧 끝나는 날이고, 밣혀서 끝나는 마지막과 말라서 끝나는 마지막이 다르지 않고, 열려서 끝나나 깨져서 끝나나, 말라서 열리거나 깨져서 열리나 다르지 않으므로 칸이 오거나 안 오거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있었다”(181~182쪽)

소설가 김훈을 ‘문장의 검객(劍客)’, ‘단문(短文)의 예술’, ‘아름다운 한국어의 발’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 처럼 남한산성에도 그의 문장은 빛을 발하고 있어 그를 이렇게 평가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다만, 삼전도 굴욕의 무엇을 형상화한 내용인지 뚜렷치 않는 데 이는 문장이 작품을 압도하는 데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비판도 있다.

* 남한산성: ‘칼의 노래’, ‘현의 노래’의 작가 김훈이 3년 만에 발표한 신작 장편소설. 출판사 - 학고재, A5 383쪽, 정가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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