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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민의 슬기로운 예술소비] 한국 미술시장의 묵혀진 GOLD BAR! '근대미술'

    [데일리안] 입력 2020.09.09 14:21
    수정 2020.09.09 14:22
    데스크 (desk@dailian.co.kr)

2013년 등록문화재 제534호 지정작품/ 배운성, 2013년 등록문화재 제534호 지정작품/ 배운성, '가족도', 1930~1935년, 캔버스에 유채, 140 x 200cmⓒ불문학자 전창곤 대전 프랑스문화원장 소장

‘가족도’ 초상화의 왼쪽 측면에 흰 두루마리의 사나이로 등장한 배운성은 해당 그림을 그린 작가 본인이다. 배운성을 소개하기에 앞서 ‘가족도’를 먼저 알아보자면, 이 작품은 불문학자인 전창곤 대전 프랑스문화원장이 프랑스에서 입수하여 2001년 국내로 들여온 48점의 작품 중 하나다.


한옥을 배경으로 대가족이 등장하는 ‘가족도’는 당대 주거와 복식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어 2013년 ‘등록문화재 제534호’로 인정된 근대문화재로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근 현대 전환기에 전통 가족의 개념을 특유의 한국적 정서가 배어 있는 분위기로 완성된 따뜻한 그림이다.


이렇게 배운성의 ‘가족도’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 잊혀져가는 20세기의 우리의 모습들을 예술로 승화된 작품으로 기억할 수 있음을 인증 받게 된 것이다.


미술의 역사는 화가가 만들어 왔다지만,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아니다. 우리는 학교 미술 수업시간에 화가에 대해서만 배운다. 이후 학자와 평론가들이 화가와 작품에 대해 쓴 책을 읽고 미술의 역사를 공부하곤 한다. 때문에 ‘미술의 역사’는 ‘화가의 역사’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미술의 역사는 수많은 화가의 작품들 가운데 특정 작품을 구입한 사람들, 즉 컬렉터가 만들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컬렉터’가 없으면 ‘화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한국 미술시장에서는 조명 받지 못하는 근대미술이라고는 하지만, 전창곤 소장과 같은 컬렉터들의 숨은 노고가 없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배운성 화가의 ‘가족도’와 같은 근대 문화재가 지금처럼 미술 수행평가의 기준은커녕 우리의 미술역사로 자리매김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배운성의 ‘가족도’와 같은 가족을 주제로 한 인물화는 분류상 ‘단체초상화’에 속하지만, 표현대상이 가족이라는 분명한 명명대상을 지닌다는 점에서 별도로 ‘가족초상화’라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초상화’는 인간의 모습인 인물을 남길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수단이었다. 자신의 모습은 물론, 인물을 주제로 한 ‘초상화’를 통해서 우리는 그 속의 인물들과 만날 수 있고, 당시의 시대상과 유행, 화가가 구현하고자 한 미적 표현의도 또한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예술소비 2단계인 이번 미술감상 포인트를 2001년 당시 43세의 프랑스 유학생 이였던 전창곤 컬렉터가 프랑스 골동품상에서 발견하고 모두 사들였다는 48점 중 ‘가족도’에 한정하고, 근대문화재가 될 수 있었던 작품임에 대하여 화가 배운성에 관한 전해진 기록들을 면밀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작가탄생의 배경은 이러하다. 그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보통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의 부호였던 백인기 집안의 급사로 들어간다. 백인기는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자본가이자 서화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배운성은 주인인 백인기의 아들 명곤의 일본 유학 생활을 뒷바라지 했던 인연으로 주인의 신임을 얻어 독일 유학생활 까지 함께하게 된다. 이후 여비가 없어 홀로 독일에 남게 된다. 전화위복인지 독자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그는 독일 화가의 권유로 한국인 최초 유럽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배운성은 이후 레벤푸크 미술학교와 베를린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27년 살롱 도톤전 입상을 시작으로 파리국제 전람회 출품, 와소르 국제미전 1등상 수상, 프라하 국제 목판화전 입상 등으로 인정받는 화가가 된다. 그렇게 배운성은 화가로 이름 날렸고 이국땅에서 반일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미륵 등 민족주의 유학생들과 교류했고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베를린 올림픽 당시에는 국내 신문사의 현지 특파원을 맡는 등 ‘조선인의 자부심’이었다.


‘가족도’는 그가 독일에서 유학한 뒤, 1930~1935년 사이에 파리로 이주하여 활동하던 중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신을 신임해 준 주인에 대한 감사함과 그리움을 담아 낸, 백인기 가족을 회상하며 제작한 초상화다.


‘가족도’에 대한 본격적인 감상 포인트로 들어가 보자. ‘가족도’는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어 보일지 모르는 한국 근대 대가족의 모습일 수 있지만, 그림에는 한옥마당에서 아기를 안고 앉아있는 할머니를 중심으로 배운성 자신을 포함해 총 17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며 작가의 정서로 그 모습들이 담겨진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마치 근대기 가족사진을 보는 듯하다. 아마도 사진을 토대로 그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도 한다.


그림 앞쪽에 자리한 개는 서구문물의 양향을 받은 근대기 상류층의 모습을 대변한다. 넉넉한 집안의 가족들이 모여서인지 근심, 걱정은 보이지 않고 가족의 안녕을 책임지는 남자들과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여인들에게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든든함과 대가족이 지닌 힘이 느껴진다. 요즘 핵가족과 달리 근대의 전통적인 대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다소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이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움이 얼핏 보기엔 촌스러움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정서는 정겹기만 하다. 화면 전반에 드러난 대가족의 따스한 분위기가 이러한 어색함 들을 보완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부터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여인까지 인물들은 모두가 다른 포즈와 표정을 취하고 있다. 어른들은 주로 흰옷을 입고, 아이들은 적색, 청색, 황색, 녹색 등 다채로운 색의 옷을 입었다. 한복을 입은 근대 한국의 전통적인 모습이 두드러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배운성의 ‘가족도’는 시대적으로 볼 때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는 다소 보기 드문 크기이자 대가족의 초상화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그 시대를 대변하는 배운 유학파 화가답게 화폭 속 인물들의 소소한 표현을 통해 배운성의 완숙한 화가의 면모는 더욱 또렷이 전해져온다. 그림의 양식은 서양화를 취하고 있지만 소재나 기법은 매우 동양적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배운성의 ‘가족도’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한국적인 따스한 정서가 담긴 그림이다. 이렇듯 초상화는 화가의 지위와 재능을 떠나 화가가 어떤 마음으로 인물을 대하느냐에 따라 그림 속 인물의 인상이 극명하게 달라 질 수 있음 또한 읽혀진다.


이처럼 ‘가족도’는 근 현대 전환기에 전통 가족의 개념을 특유의 한국적 정서가 배어 있는 분위기로 완성한 따뜻한 그림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될만한 근대문화재로서의 그 가치를 자아낸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배운성의 다수의 ‘초상화’에는 ‘가족도’처럼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 등장한다. 초상화는 ‘특정 인물을 묘사하는 회화의 한 장르’이다. 그중에서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자화상’은 현재에 이르러 역사나 풍속의 연구 자료로서 높이 평가되며 활용되고 있는데, 배운성 또한 이를 염두하고 창작한 것 인지도 모르겠다.


2001년 전창곤에 의해 들여온 48점 외에 배운성의 작품 중 국내에 남아 있는 그림은 현재 10여점 가량이며, 이중 ‘노랑저고리’, ‘해금강 총석정’ 등이 1997년과 98년에 열린 '근대를 보는 눈 전(국립현대미술관)‘과 '다시 찾은 근대미술전(덕수궁미술관)‘에서 일반에 공개된 바 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얼굴을 판화로 최초 형상화하기도 했던 배운성은 지난 1988년 해금 될 때까지 남한에서는 금기의 미술인으로 간주되어 왔다. 월북 후, 평양미술대학을 세우고 예술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교수로서의 활동 등 북한 미술계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하다가 1978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운성이 월북 후에 그린 작품은 지금까지 국내에 반입되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배운성은 점잖고 친절한 성격 덕에 유럽 활동 당시 예술가들과 친분을 넓혔고, 명망

있는 인사들의 초상화도 자주 의뢰 받았다고 전해진다. 어디선가 묵혀져 있을 화가 배운성의 값진 초상화 소식들을 또 다시 기다려본다.


필자는 요즘 들어 묵혀놓았던 ’GOLD BAR’가 ‘진짜 금값 된 금 시세’라는 뉴스를 보며, 묵혀진 우리의 근대 미술시장을 다시금 되짚어 보게 되었다. 예술을 토대로 민족의 역사가 기록되고, 그 기록이 우리민족의 문화재로서 후세들에게 대대손손 전해진다는 이 얼마나 값진 예술의 금맥이 아니겠는가! 비단, 문화재에 국한된 예술을 논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근대미술은 반드시 주목 되어져야 할 ‘한국 미술시장의 묵혀진 금맥 ’GOLD BAR’ 임을 확언하며, 칼럼을 통해 전창곤 컬렉터와 같은 한국 미술을 사랑하는 슬기로운 컬렉터들에게 큰 존경과 경외의 마음을 전해본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행복하고 단란했던 한 때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예나 지

금이나 그 마음만은 매 한가지 일 것이다. 곧 다가올 민족 명절 한가위가 지금의 우리에겐 결코 반갑지만은 않다. 지혜로운 선조들을 본 받아, 지금의 여러 난국이 훗날 후세들에게 슬기롭게 대처한 모습들로 기록되어지길 바라며, 우리 민족의 ‘가족도’ 속에서 무탈하고 건강한 한가위를 보낼 수 있길 바래본다.


ⓒ

글/홍소민 이서갤러리 대표(aya@artcorebrow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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