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압력에 CEO 거취 흔들
낙하산 인사 투하 가능성 우려
대형 금융사 수장들의 인사철을 앞두고 돌연 관치 그림자가 엄습했다. 정치권의 압력이 금융사 최고경영자(CEO)의 거취를 직접적으로 흔드는 가운데, 그 자리를 외부 낙하산이 꿰차게 될 것이란 우려가 확산되는 양상이다.
금융그룹과 은행 등 금융권 CEO 인사가 줄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변수로 긴장감이 커지는 가운데, 심지어 노동조합까지 회장님 편에 서서 방어전에 나서는 이례적인 장면마저 펼쳐지고 있다.
11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9일 라임자산운용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와 관련해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에 대한 문책경고 제재가 정례회의에서 의결됐다. 지난해 4월 금융감독원이 해당 펀드 판매 당시 우리은행장이었던 손 회장에게 적용했던 중징계 결정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번 결정은 연임에 도전하고 있는 손 회장에게 최대 리스크가 될 전망이다. 문책경고를 받은 금융사 임원은 3년 간 신규 취업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손 회장은 내년 3월까지인 현 임기는 마칠 수 있지만, 연임은 할 수 없다.
다만, 손 회장이 불복 소송을 제기하고 집행정지를 신청해 제재 효력을 정지하면 연임에 나설 수도 있다. 손 회장은 2020년에도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로 인해 중징계인 문책경고를 받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연임에 성공했다. 손 회장은 현재 DLF 징계 불복 행정소송에서 1·2심 모두 승소한 상태다.
1조원이 훨씬 넘는 손실을 낳은 라임펀드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손 회장이 완전히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금감원에 따르면 환매가 연기된 라임펀드는 2019년 말 기준 총 1조6679억원인데, 이 중 우리은행의 몫만 3577억원으로 은행권에서 가장 많다.
하지만 공교로운 건 타이밍이다. 금융위가 1년 반이 넘도록 차일피일 결정을 미뤄오다가 손 회장의 연임 직전에 징계 카드를 꺼내 든 형국이다. 이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정치권의 의중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뒷말이 빠르게 번졌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CEO에 앉히던 과거의 관치 금융이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였다.
손 회장에 대한 중징계가 나오기 직전 금융당국 수장이 직접 이런 측면이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기류는 더 묘해졌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전날 오전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장들과 간담회 이후 손 회장의 제재와 관련해 "국회에서도 지적이 되고 있어 미뤄둘 수 없었다"고 언급했다.
김지완 BNK금융 회장의 불명예 퇴진도 이런 면에서 보면 비슷한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다. 김 회장은 최근 아들이 다니는 회사를 부당 지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정치권으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았고, 결국 지난 7일 사임했다. 임기 만료를 불과 5개월여 앞둔 시점이었다.
의혹은 정치권에서 불거졌다.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김 회장의 아들이 한양증권으로 이직한 시기부터 (한양증권이 인수하는) BNK금융 계열사 채권이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김 회장의 아들은 한양증권 내 채권 발행 담당 부서 센터장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김 회장의 사임 직전인 지난 4일 BNK금융 이사회가 경영승계 규정을 건드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차기 회장 후보군에 그룹 계열사 대표 이외에 외부 인사도 포함토록 하면서다. 정치권의 입김에 현직 CEO가 자리를 떠나게 된 마당에 외부 낙하산 인사의 회장 취임이 가능하게 된 셈이다. 관치인사론이 더욱 확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사정이 이렇게 흘러가면서 다른 금융사 CEO 인사를 둘러싼 긴장감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질 전망이다. 당장 손병환 NH농협금융 회장의 임기는 올해 말까지다.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과 손태승 회장의 임기도 내년 3월 종료를 앞두고 있다. 진옥동 신한은행장과 권준학 NH농협은행장의 임기는 오는 12월 말까지, 박성호 하나은행장의 임기는 내년 3월까지다.
결국 금융사 내부에서 반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금융노조는 지난 8일 낸 성명에서 "권력자의 측근이나 현장경험 하나 없는 모피아 출신을 금융권 낙하산으로 보내려 한다면 저지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금융노동조합협의회도 다음 날 성명을 통해 "정권에 의탁한 관치 인사의 우리금융 장악 시도를 중단하라"며 "무리한 중징계를 통해 현 CEO를 몰아내고 관치 인사를 시도하는 흔들기가 계속된다면 강력하게 투쟁하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