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초과이익 공유·안보 기여' 등 까다로운 조건 내걸어
보조금 지원 받을 경우 반대로 잃을 것도 많다는 지적
메모리· 파운드리 별개 협상 필요성 있다는 전문가 주장도
반도체 글로벌 패권을 되찾겠다고 선언한 미국이 자국에 투자하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내건 보조금 지급 조건이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소위 과도한 미국 우선주의 '독소조항' 때문이다. 이에 미국에 투자를 결정하고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이 미국 투자 및 보조금 수령과 관련해 득실을 신중히 따져야 한다는 업계 관측이 나온다.
2일 한국 반도체 업계 안팎에서는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 지급 조건과 관련해 교차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칫 국내 반도체 기술이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와 동시에 향후 미 상무부와 진행될 협상 과정과 세부 조건을 면밀히 살펴본 후 보조금 신청에 나설지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관측이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반도체지원법에 따른 반도체 생산 지원금 신청 절차와 함께 심사 기준을 공개했다. 미국이 반도체 산업에 대한 527억달러 규모의 재정지원과 투자세액공제 25%를 규정한 반도체지원법이 지난해 8월 발효된데 따른 후속 조치다.
우선 미국 상무부는 미국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짓는 모든 기업들에게 390억 달러(한화 약 51조원) 가량을 지원하기로 했다. 아울러 지급 주요 조건은 ▲초과이익 환수 ▲국가안보 지원 ▲가드레일(안전장치) ▲인력 양성 ▲공급 과잉 해소 협력 등이다.
미국 정부가 밝힌 이같은 심사기준(조건) 가운데 논란이 되는 것은 바로▲초과이익 환수 ▲국가안보 지원 부분이다. 먼저 초과이익 환수는 1억5000만달러(한화 약 2000억원) 이상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당초 제출한 전망치보다 높은 이익을 올릴 경우 초과 이익을 미국 정부와 나눠야 한다는 내용이다. 미국 정부 입장에선 지원한 자금의 최대 75%까지 회수해 자국 반도체 육성에 쓸 수 있다.
또한 국가안보 심사 기준의 경우, 미 국방부에 연구 생산 시설 접근을 허락하는 기업들에게 우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미국의 국방 시설·첨단무기 개발에 도움이 되는 반도체 기업에 우선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에 해당 기업은 반도체 생산 및 연구시설을 공개해야 한다는 단서를 단 것이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달 23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반도체 지원법은) 근본적으로 국가안보에 관한 사항으로 보조금 지급을 통해 얻는 것은 국가 안보 목표의 달성"이라고 공개적으로 못 박은 바 있다. 또한 반도체 지원법 목표가 중국과의 기술경쟁인 만큼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향후 10년간 중국 투자가 제한된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기업 영업기밀을 요구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치열한 기술 경쟁을 벌이는 기업들이 자칫 보조금을 받는 과정에서 기술 유출 위험에 놓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반도체 기업들은 보안을 위해 생산 시설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생산 시설 접근 허가 뿐만 아니라 초과 이익 심사 과정에서도 미국 정부가 지나치게 상세한 투자 현황이나 수익성 지표를 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우리 기업이 피해를 받을 수도 있다.
'과잉 개입' 우려까지 나오는 이유다. 이처럼 예상을 빗나가는 기준들로 인해 국내 반도체 업계는 "보조금을 포기해야되느냐"며 당혹스러운 눈치다. 미국 텍사스에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와 향후 건립 예정인 SK하이닉스 등은 투자 리스크를 안아야하는 상황이 됐다. 기업들은 세부 조건을 면밀히 검토한 후 보조금 신청에 나설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다만 그럼에도 해당 조건들이 보조금의 필수조건보다는 '우선순위' 조건이기 때문에 향후 미 상무부와 반도체 기업, 그리고 우리 정부가 벌이는 협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전문가 분석도 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우리에게 독소조항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만 최소화한다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반도체 기술 개발에 정통한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이와 관련해 "미국의 요구가 과한 것은 맞다. 다만 크게 본다면 일단 미국의 요구에 협조하고 우리에게 불리한 부분은 협상으로 최소화시키며 우리가 더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찾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본다"고 했다.
임 전 사장은 "미국의 경우 현재 제조업이 망가지고 엔지니어도 부족하다. 현재 과도한 미국의 요구는 어떻게 보면 (반도체) 약자의 몸부림 같은 것"이라며 "미국은 반도체를 발명해 키워온 국가로 90년대까지만 해도 특허 문제 등으로 인해서 우리가 많은 고생을 했다가 이후 또 그런 현상이 사라지는 등의 산업 흐름이 있었다는 점을 봐야한다."고 했다.
그는 "몇 년 이대로 가다가 한계를 느끼면 또 다시 규제 등이 완화될 수도 있다고 본다. 다만 기술 유출 우려와 관련해서는 미국 정부로부터 마이크론 등의 현지 기업에 보안이 새나가지 않도록 우리 기업과 정부가 철저히 요구하고 협상을 지어야 할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임형규 전 사장은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나눠서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메모리 부분은 우리가 글로벌 70% 지분을 가지고 있고 상당한 점유율과 우위를 점하고 있기에 협상에서 유리할 수 있는 반면, 파운드리의 경우 반대로 고려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파운드리의 경우 TSMC와 같은 조건이면 우리가 크게 잃을 게 없다. 파운드리는 우리가 아직 약한 부분이고, 입지가 안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요구를 따라주지 않을 경우) 자칫 더 동력을 잃을 수 있으므로 고전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협상을 이어나갈 필요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산업부는 지난 1일 자료를 내고 미국 상무부와 가드레일 조항에 대한 세부 규정 협의를 이어나가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산업부는 우리 기업 경영에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업계와 대응 방안을 논의한 뒤, 미국 관계 당국과 계속 협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