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이익 환수' '반도체 시설 공개' 단서 단 美 반도체 보조금 정책에 기업 '당혹'
절실해진 美 기술 안보…"韓, 美 공급망 흐름 동참하되 中 협력 여지 남겨야"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전쟁이 가속화되면서 국내 업체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초과이익 환수' '반도체 시설 공개' 단서를 단 보조금 정책이 오랜 기간 쌓아올린 한국의 글로벌 위상을 한순간에 뒤흔들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반도체 보조금 신청을 놓고 기업들의 셈법이 복잡해진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 시기를 적극적인 반도체 가치사슬(밸류체인) 전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확대하되, 최대 시장인 중국과의 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여지를 가급적 마련해야한다는 주장이다.
7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이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기업 관계자들과 만나 미국 반도체지원법(CHIPS Act)과 관련한 의견을 청취한다. 미 상무부가 발표한 반도체 보조금 정책과 관련해 업계의 우려와 요구사항 등을 수렴하고 지원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취지다.
앞서 미 상무부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장려하기 위한 총 527억 달러(약 69조원) 상당의 보조금 정책을 발표했다. 반도체 생산에 390억 달러, 연구개발(R&D)에 132억 달러다.
한국 기업들이 이 보조금을 받으려면 미국이 내건 까다로운 조건들을 이행해야 한다. 먼저 보조금을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원) 이상 받는 기업은 초과 이익을 달성하면 미 정부에 일정 부분을 공유해야만 한다. 규모는 지원 보조금에서 최대 75%까지 가능하다.
미국은 주요 반도체 생산 제품과 생산량, 주요 고객과 더불어 생산 장비와 원료명도 기재할 것도 요구했다. 아울러 군사용 반도체 개발과 공급에 협력할 기업을 우대하겠다고 해 사실상 '반도체판 노예계약'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보조금이 이득 보다는 손실이 커 족쇄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미국은 중국 등 우려 국가에 반도체 투자를 금지하는 '가드레일' 조항도 3월 중 공개할 예정이다. 보조금을 수령하려면 중국과 공동 연구를 하거나 기술 이전을 할 수 없으며, 앞으로 10년간 생산량도 늘릴 수 없다.
이 정책이 그대로 관철될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지적재산·영업비밀 노출이라는 리스크는 물론 중국 사업 동력을 잃는 악재를 겪게된다. 일각에서는 한국 반도체가 '독소 조항'을 이행하다 미국의 종속 기업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위기에 빠진 한국 반도체가 민·관 외교력을 총동원해 협조할 것은 협조하되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얻어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 마디로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전략이다.
먼저 미국이 반도체, 전기차 등 공급망 관련 법안을 잇따라 쏟아내는 것은 그만큼 미국이 절박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미국이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는 동시에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 힘을 기울이는 상황을 활용해 우리의 협상력을 최대한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지원법은 미국이 그만큼 반도체 기술 보안과 제조업 육성에 절박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라며 "한국은 기업 이익 측면에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안보전략 차원에서 중국의 기술 탈취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2018년 미국 법무부는 미국 마이크론의 D램 설계와 제작 기밀기술을 탈취한 혐의로 중국 국영 반도체 회사 푸젠진화, 대만 반도체 회사 UMC 전현직 경영진을 기소한 바 있다.
기소에 앞서 미국 상무부는 미국의 군사 시스템용 칩 공급업체의 생존에 '심대한 위협'을 끼쳤다며 자국 기업의 푸젠진화에 대한 수출을 막는 제재 조치를 했다.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기술 탈취 방어벽을 높게 쌓는 상황을 기술 안보 차원에서 유리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자사주 매입 계획, 초과이익 공유 등은 양측이 따져볼 여지가 있어 한국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봤다.
반도체 지원법을 놓고 미국과의 힘겨루기를 하는 동시에 '탈중국'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갈수록 늘어나는 중국 내 생산비용과, 기술 보안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중국 외 지역으로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 낸드플래시 생산 공장과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우시에 D램 공장을, 충칭에는 후공정 공장을 두고 있다. 다롄에는 인텔로부터 인수한 낸드 공장이 있다.
첨단 설비 업그레이드 없이 저수익 제품을 계속 생산·판매한다는 것은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온 양사에 큰 손해다. 삼성은 누적 기준 시안 공장에 33조원, SK하이닉스는 25조원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동향분석실장은 "중국 내 생산시설은 비첨단제품 중심으로 생산량이나 시설 유지가 필요하다고 미국측을 설득해야 한다"면서 "생산 축소가 불가피할 경우 장기적인 사업 축소 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공정별로 한국, 동남아, 미국 등을 연계한 반도체 생산 가치사슬을 잘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며 "주요 시장인 중국을 포기할 수 없는 만큼 후공정 등 공정별로 중국과 다양한 협력은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