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요금 책정 '연료비연동제' 유명무실
정치권의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한국전력
에너지 요금의 정치화가 극심하다. 정부는 전기·가스요금 인상을 미루고 미뤄오다가 결국 부담을 차기 정부에 떠넘겼으나 새 정부 역시 출범 직후 요금 인상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정부와 정치권의 에너지 요금 폭탄 돌리기가 지속될수록 한국전력의 고충이 가중되고 무엇보다 그 피해가 국민과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가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연료비 연동제'의 무력화는 에너지 요금이 정치화됐음을 드러낸 단적인 사례다. 연료비 연동제는 전기 생산에 쓰이는 연료 가격을 전기요금에 주기적으로 반영하는 제도다. 정부와 한전이 10여 년 논의 끝에 지난해부터 도입했다. 이 제도를 시행하면 전기요금을 합리적으로 책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에게도 합리적인 전력 소비를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기대했다.
그러나 이는 기대에 그쳤다. 연료비 연동제 시행 후 LNG·유류·석탄 등 국제 연료비가 급격하게 치솟아 요금 인상의 적기라는 평가가 컸음에도 에너지 요금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정부는 지난해 1분기 전기요금을 ㎾h당 3원을 인하하더니 2·3분기 연달아 동결했고 4분기에는 다시 3원을 올렸다. 올해 1분기와 2분기에도 동결을 거듭했다. 정부는 '물가상승 우려'를 언급했지만 사실상 탈원전, 부동산, 코로나 방역 등 정책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덮기 위해 에너지 요금을 악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컸다.
연료비 폭등에도 전기요금을 찍어누르던 정부는 임기 말이 다가오자 요금 인상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해 12월 정부는 "2022년 4월과 10월 기준연료비를 인상하고 4월부터는 기후환경요금도 올리겠다"고 공표했다. 임기 내내 여론을 자극하지 않는 전기요금 마지노선을 칼같이 지켜온 정부가 정권교체기에 인상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이를 두고 "에너지 요금 인상 부담을 차기정부에 전가하려는 의도"이라는 분석이 팽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금 인상 계획은 또다시 흔들렸다. 현 정부와 반대 기조의 야권 대선 후보가 당선된 직후다. 지난달 20일 저녁 7시께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전은 출입기자들에게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당장 다음날 예정이었던 2분기 연료비 조정단가 발표가 잠정 연기됐다는 것이다.
불과 12시간여를 앞두고 급하게 발표를 미룬데 대해 정부는 산업부와 관계부처 간 협의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실상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의 협의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윤 당선인은 4월로 예고된 전기료 인상을 백지화하겠다는 공약을 냈는데 이는 정부의 요금 인상 계획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올 2분기 전기요금 핵심 요소인 연료비 조정단가를 동결하기로 했다. 다만 기존에 발표한 대로 기준연료비와 기후환경요금은 인상되면서 이달부터 전기요금은 kWh당 6.9원이 올랐다. 정부가 이미 확정된 전기요금 인상 계획을 뒤집은 건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인수위 '눈치 보기'를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윤 당선인의 '4월 전기료 인상 백지화' 공약과 매년 불어나는 한전 적자 사이에서 또다시 고육지책을 선택한 결과이기도 하다. 한전은 요금 정상화를 위해 올 2분기 연료비 조정단가를 1㎾h당 33.8원으로 산정해 산업부에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사이 한전은 골병이 들고 있다. 한국거래소와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발표한 2021년 상장기업 실적을 보면 한전은 지난해 상장사 가운데 가장 적자폭이 컸던 기업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2020년 4조862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던 한전은 지난해 5조8601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정부가 연료비 조정단가 동결 기조를 유지하면 한전의 적자 규모가 최대 20조원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공기업 실적 악화는 직·간접적인 국민부담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한전의 재무구조 악화는 향후 연료비가 떨어질 때 전기요금 인하 여력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결국 국민의 혈세로 채워진다. 또 한전의 손실은 빚으로 누적돼 이자 부담을 키운다. 지난해 말 기준 한전의 부채총계는 145조7970억원이다. 2020년 말 기준 132조4752억원에서 1년 새 13조원 넘게 늘어난 셈이다. 이중 한전이 지난해 부담한 이자비용은 1조9144억원에 달했다.
윤석열 당선인은 후보 시절 "전기요금은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과학과 상식에 입각해서 결정해야 한다"며 "윤석열 정부는 이념과 진영논리가 아니라 공정과 상식에 근거한 전력공급 계획을 수립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새 정부가 에너지 요금의 정치화라는 고질적인 굴레를 벗어나 건전한 전력산업계의 발전에 기여할 합리적인 에너지 요금 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지 국민의 눈과 귀가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