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GM‧르노코리아, 당분간 전기차 생산계획 없어
부품업계 전기차 전환 및 생산물량 확보 현대차그룹에 달려
부품업계에 5조2000억원 지원…업계 '맏형'으로서의 책임감 보여줘
국내 자동차업계를 ‘맏형’ 격인 현대차그룹을 이끄는 정의선 회장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자동차 전동화 전환이 본격화되면서 현대자동차와 기아 뿐 아니라 관련 부품업계를 포함한 국내 전기차 생태계 전체를 책임지는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됐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앞으로 최소 5년가량은 국내에서 전기차를 생산하는 완성차 업체는 현대자동차와 기아, 쌍용자동차 등 3곳에 불과할 전망이다. 5년 이후에도 추가적인 완성차 생산업체가 합류한다는 보장은 없다.
완성차 5사 중 한국GM과 르노코리아자동차는 아직까지 국내에서 전기차 생산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자체적으로 차량을 개발‧생산‧판매하는 독립 기업이 아닌, 외국 기업에 종속된 한국 생산기지의 한계상 본사인 제너럴모터스(GM)와 르노그룹의 글로벌 사업 구상에 한국GM과 르노코리아의 운명이 달려 있다.
두 회사는 최근 잇달아 본사 경영진을 한국으로 초청해 국내 언론사들을 대상으로 한국에서의 사업 구상을 발표했다. 한국에서의 전기차 생산 계획에 대한 GM과 르노그룹 경영진의 공통적인 답변은 “지금으로서는 계획이 없다”였다.
루카 데 메오 르노그룹 회장은 지난 11일 한국 방문 기자간담회에서 전기차 국내 생산 여부에 대한 질문에 “아직 전기차를 한국에 소개할 계획은 없지만, 기술은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보고 있다”면서도 “하이브리드, 플러그인하이브리드 등 다양한 것들이 나오고 있어 내연기관에 미래가 아직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시프 카트리 GMI(GM해외사업) 생산부문 부사장은 지난 19일 창원공장에서 열린 GM 한국 출범 20주년 기념식에서 “우리는 한국에 큰 투자를 했고,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은 내연기관차”라면서 “지금은 창원에서 CUV를 만들어야 하고 전기차를 생산할 여력이 없다. 나중에 시설 전환을 해야 전기차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르노그룹과 GM 모두 여지를 남겨놓긴 했지만 전기차의 한국 생산에 대한 확답을 주진 않았다. 두 회사 모두 한국 공장을 당분간 ‘내연기관차 생산기지’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은 미국이나 중국, 유럽처럼 시장 규모가 크지 않다. 그나마도 현대차‧기아의 점유율이 압도적이라 해외 브랜드가 설 자리는 좁다. 단순히 생산 거점으로만 활용하기엔 임금 수준도 높은 편이다. 즉, 전기차가 아직까지 자동차 시장의 주류로 자리잡지 않은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전기차 생산 전환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기엔 실익이 크지 않은 게 현실이다.
설령 르노코리아와 한국GM에서의 전기차 생산 계획이 수립된다 해도 전기차 양산이 시작되려면 최소 5년은 기다려야 한다. 르노그룹은 르노코리아에서 중국 길리홀딩그룹과 합작으로 하이브리드차 ‘오로라’를 생산하는 한편, 중장기적으로 중대형 내연기관차 생산기지로 활용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들 차종의 수명주기가 다할 때까지 전기차 생산 투입이 이뤄지긴 힘들다.
GM은 한국GM을 소형 SUV 트레일블레이저와 차세대 CUV 생산기지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지난 2018년부터 세워놓은 상태다. 당시 GM은 산업은행과 한국GM의 회생 지원에 합의하며 2종의 신차를 투입해 10년간 한국에서 사업을 지속하겠다고 약속했다. 2027년까지는 이들 두 차종이 한국GM의 주력 생산 차종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같은 상황은 최소 5년 이상 국내 전기차 산업 생태계를 사실상 현대차그룹 홀로 이끌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그동안 완성차 5사는 일부 전속 협력사 외에 상당수의 협력사들을 공유하며 자동차 산업 생태계를 공동으로 유지해 왔지만, 이런 구조가 깨지게 되는 것이다.
쌍용자동차가 전기차 코란도 이모션을 생산하고 있고, 이후에도 전기차 모델들을 내놓을 예정이지만 시장 점유율이 미미한 수준이라 현대차‧기아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부품업체 입장에서는 5개였던 거래선이 3개로 줄어드는 셈이다.
정부가 현대차그룹에 손을 내민 것도 이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19일 현대차‧기아 기술연구소를 찾아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자동차 산업 상생 및 미래차 시대 경쟁력 강화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내연기관차 부품업계가 생존하려면 전기차 부품으로의 사업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현대차가 주도적으로 지원에 나서줄 것을 요청한 셈이다. 협약식에는 한 총리 외에도 정부 각 부처 차관급 인사와 관계가관‧단체장들도 참석했지만, 사실상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현대차그룹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날 5조2000억원 규모의 부품업계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부품업체들의 전기차 전환,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한 기술적 지원 및 신사업 정보 제공 등도 약속했다. 업계 ‘큰형님’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전기차 시장은 국내에서 전기차를 생산되는 현대차‧기아가 해외에서 생산된 수입 브랜드 전기차와 맞서는 구도가 상당기간 유지될 것”이라며 “현대차그룹으로서는 산업 생태계를 홀로 지탱하며 외로운 싸움을 벌이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