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반도체 세액공제율 확대
대통령 한마디에 입장 뒤집어
‘경제정책 총괄 기관’ 위신 추락
결과적으로 체면을 제대로 구겼다. 스스로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했던 것을 불과 며칠 만에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기획재정부와 이를 이끄는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이야기다.
추 부총리는 기재부 공무원 출신이자 재선 국회의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분과 간사를 맡길 정도로 경제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이런 그가 지난 3일 정부가 국가전략산업 투자 세액공제율 확대 정책을 발표하면서 입장이 난처해졌다.
정부는 이날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투자에 대해 최대 25%+α 규모 세액공제 확대 계획을 담은 ‘반도체 등 세제지원 강화 방안’을 내놓았다. 반도체와 이차전지 같은 국가전략기술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대기업과 중견기업 기준 현행 8%에서 15%로 올리고 투자 증가분에 대한 10%의 추가 세액공제까지 합친 것이다.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높였다.
반도체 세제지원은 지난달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관련 법이 통과한 상태다. 대기업과 중견기업 기준 6%였던 세액공제율을 여야 합의로 8%로 높였다. 정확히는 기재부가 국회에 제출한 ‘정부안’을 정치권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법 통과 11일 만에 정부가 추가 감세를 결정하면서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졌다.
정치권에 따르면 애초 여당은 세액공제율을 20% 이상 확대하는 안을 내놓았다.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주요국이 반도체 지원을 확대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야당에서도 기존 6%에서 10%로 4%p 확대를 요구했다.
이를 막아선 게 추 부총리와 기재부다. 기재부는 여당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내년도 법인세 세수가 2조6970억원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며 제동을 걸었다. 기재부는 경쟁국과 비교해 세액공제율이 지나치게 낮다는 언론 비판이 잇따르자 ‘반도체 투자에 매우 높은 수준으로 세제지원 중’이라며 해명 자료까지 냈다. 추 부총리도 기자 간담회에서 8% 세액공제율도 절대 낮지 않은 수준이며, 대만 등 경쟁국보다 높다고 했다.
기재부가 태도를 바꾼 데는 윤석열 대통령 역할(?)이 컸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 임시 국무회의에 앞서 “기재부는 관계부처와 협의해 반도체 등 국가 전략산업에 대한 세제지원을 추가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정부 요구대로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대통령이 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자 대통령실과 기재부의 정책 엇박자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기재부가 관련 법안을 국회 제출하기 전에 당연히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텐데,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펼쳐지게 됐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기재부가 법인세 3%p 인하를 확신하고 세액공제율 확대 폭을 좁혔다가 법인세가 뜻대로 안 되자 다시 세액공제를 늘리기로 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이런 분석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 이번 사태로 추 부총리와 기재부 꼴이 좀 우습게 된 건 분명하다.
이번 사태 원인을 찾거나, 무능을 지적하거나, 누구 책임인지를 물으려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 경제정책을 총괄 조정하는 기관과 그 기관을 이끄는 부총리의 ‘체면’이 상했다는 게 중요하다. 일부 언론에서는 윤 대통령이 추 부총리를 ‘질타’, ‘질책’했다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다.
구겨진 체면을 바로 펴는 방법은 있다. 보란 듯 자기 능력을 뽐내면 된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올해 한국 경제는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 역설적으로 어려울 때일수록 실력을 펼칠 기회는 많아지는 법이다. 추 부총리와 기재부는 자신들 전공인 ‘경제’를 통해 숨겨둔(?) 실력을 발휘하고 위신을 바로잡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