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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밝은 빛으로 가장 깊은 어둠을 이긴다


입력 2018.12.08 06:00 수정 2018.12.08 05:04        이석원 객원기자

<알쓸신잡-스웨덴㉖> 12월 13일 극야를 밝히는 루시아 데이

전통과 기독교가 만나 긴 밤의 공포 이겨내는 화려한 축제

<알쓸신잡-스웨덴㉖> 12월 13일 극야를 밝히는 루시아 데이
전통과 기독교가 만나 긴 밤의 공포 이겨내는 화려한 축제


스웨덴 최대 가톨릭 성당인 스톡홀름 주교좌 대성당의 루시아 (사진 = 이석원) 스웨덴 최대 가톨릭 성당인 스톡홀름 주교좌 대성당의 루시아 (사진 = 이석원)

1년 중 가장 어두운 날을 즈음해 스웨덴은 가장 밝은 빛이 빛난다. 성탄을 열흘 남짓 남겨놓은 날 세상을 밝히는 루시아의 초다.

스웨덴에서 12월 13일은 루시아 데이(Lucia day. 스웨덴어로 Luciasdag)라고 부른다. 오후 3시면 완전히 밤이 되고, 북쪽의 도시에는 아예 낮이 존재하지 않는 극야(極夜)의 계절이다. 6월 하순 거의 24시간 해가 떠 있는 백야와 대비되는 때, 스웨덴 사람들은 그 길고 어두운 밤을 나름의 방식으로 만끽한다.

이날 마을과 교회와 학교와 회사 등에서는 루시아를 뽑는다. 루시아로 뽑힌 여자 아이는 붉은 천으로 만든 허리띠를 두른 순백의 단아한 드레스를 입는다. 그리고 머리에는 7개의 양초와 블루베리 가지로 만든 관을 쓴다.

‘홴고사(stjärngossar. 별 소년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남자 아이들과 ‘루시아의 태르누르(Lucias tärnor. 루시아의 들러리)’라고 불리는 여자 아이들이 초를 들고 긴 줄을 만들어 루시아의 뒤를 따른다. 루시아와 아이들은 함께 교회를 중심으로 마을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이를 ‘루시아 톡(Lucia tåg. tåg는 기차라는 뜻))’이라고 부른다.

루시아와 아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그뢱(Glögg)’이라고 부르는 계피를 넣어 끓인 와인과 생강으로 만든 쿠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라는 샤프론을 넣어 만든 빵 ‘루세카테르(Lussekatter. 루시아의 고양이들)’를 나눠준다.

스톡홀름 인근 밸링뷔에 있는 루터교회 상트 토마스 성당의 어린이 루시아 (사진 = 이석원) 스톡홀름 인근 밸링뷔에 있는 루터교회 상트 토마스 성당의 어린이 루시아 (사진 = 이석원)

스웨덴의 ‘루시아’는 고대 농경 사회의 전설과 기독교 신앙이 결합된 특별한 날이다.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제일 짧은 날이다. 이날은 오래전부터 어둠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온갖 귀신과 요물이 활동하는 밤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동물들이 사람의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믿었다.

루시아는 기독교에서 빛의 성인으로 통한다. 스웨덴 전통과 기독교가 결합했다. 루시아가 교회를 출발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두려운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선사한다. 루시아의 빛이 귀신과 요물들을 도망치게 하고, 동물들이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을 막아준다. 가장 어두운 두려움의 밤이 가장 찬란한 빛으로 바뀌는 기적이 된 것이다.

루시아와 노벨상이 결합된 에피소드도 있다. 노벨상 시상식은 매년 12월 10일 루시아 직전이다. 스톡홀름 시내 콘서트홀에서 시상식을 마친 수상자들은 스톡홀름 시청 1층 블루홀에서 화려한 만찬 파티를 즐긴다. 그리고 그들은 스톡홀름에서 가장 비싼 그랜드 호텔에 묵는다.

그런데 그곳에 루시아가 찾아간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파티의 여흥을 즐기고 있을 무렵 실내가 어두워지고 루시아와 아이들이 등장해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그뢱과 루세카테르를 나눠준다.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갑자기 등장한 루시아를 보고 놀라는 모습이 담긴 사진은 지금도 스웨덴의 신문과 방송에 간간히 등장한다.


스웨덴 사회에서 루시아를 했었다는 것은 대단한 자랑거리다. 루시아가 되려면 평소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공부를 잘 하거나, 외모가 뛰어난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지만, 봉사 활동은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된다. 평소 자선 활동을 많이 했거나 선행을 많이 베풀었던 것도 루시아가 되기 위한 요건 중 하나다.

루시아 경력을 이력서에 쓰기도 한다. 괜찮은 ‘스펙’인 셈이다. 현 중앙당의 당수인 아니 뢰프는 국회의원 이력서에 루시아 경력을 기재했다. 그는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루시아를 했던 일을 늘 자랑했다. 한 방송사의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는 자신의 경력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국회의원이나 최연소 중앙당 당수가 아니라 루시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루터교가 국교인 스웨덴에서 율(Jul)이라고 부르는 성탄이 큰 명절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율은 가족 명절이다. 대외적인 행사보다는 교회에서 미사를 보고 가족들이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는 정도다.

하지만 성탄을 준비하는 루시아는 다르다. 스웨덴 공영 방송이 SVT에서는 루시아를 생중계한다. 지난해에는 스톡홀름 시청 근처에 있는 쿵스홀름 교회(Kungsholms kyrka)의 루시아를 1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글/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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