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후 처음…1년 새 7.5조 급감
금융시장 불안 속 안전 자산 축소에 우려 목소리
국내 생명보험사들이 보유한 현금 자산 규모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10조원 아래까지 쪼그라든 것으로 나타났다. 저금리 기조가 심화하고 새로운 규제 시행까지 다가오자, 현금을 마냥 들고 있기 보다는 적극적인 투자에 나선 결과로 풀이된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이하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이처럼 안전 자산을 줄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이란 지적도 나온다.
18일 생명보험협회에 따르면 국내 24개 생보사들이 보유한 현금 및 예치금은 지난해 11월 말 총 9조2683억원으로 전년 말(16조7454억원)보다 44.7%(7조4771억원)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생보업계의 현금·예치금 규모가 이처럼 10조원 아래로 떨어진 것은 분기 기준으로 2009년 9월 말(9조3267억원) 이후 처음이다.
주요 빅3 생보사들의 추이를 살펴보면 우선 삼성생명의 현금·예치금이 조사 대상 기간 4조8576억원에서 1조1604억원으로 76.1%(3조6972억원)나 감소했다. 교보생명 역시 1조8106억원에서 9150억원으로, 한화생명도 8456억원에서 4069억원으로 각각 49.5%(8955억원)와 51.9%(4387억원)씩 현금·예치금 보유량이 줄었다.
이에 따라 보험사들의 전체 자산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눈에 띄게 축소됐다. 생보업계의 총 자산 중 현금·예치금의 점유율은 같은 기간 1.8%에서 1.0%로 낮아졌다. 삼성생명은 1.7%에서 0.4%로, 교보생명은 1.7%에서 0.8%로, 한화생명은 0.7%에서 0.3%로 일제히 하락했다.
이처럼 생보사들이 현금성 자산을 줄이고 나선 배경으로는 우선 수익성 개선이 꼽힌다. 현금은 금융사가 운용하는 자산 형태 중 안전성이 가장 높지만, 대신 운용 수익률이 낮다. 결국 현금 보유가 많을수록 보험사 입장에서는 그 만큼 투자 수익 창출 기회를 잃게 되는 셈이다.
가뜩이나 생보업계는 실적 부진에 우려가 깊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생보사들이 지난해 들어 3분기까지 거둔 당기순이익은 총 3조1515억원으로 전년 동기(3조569억원) 대비 3.1%(946억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같은 기간 손해보험사들의 당기순이익이 2조4232억원에서 2조1983억원으로 10.2%(2249억원)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크게 못 미치는 성장률이다.
여기에 더해 코로나19를 계기로 갑작스레 현실화 한 제로금리 시대는 생보사들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인 자산운용에 나서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시장 금리가 떨어질수록 통상 투자 효율도 함께 낮아지는 만큼, 현금을 다른 곳에 투입해 운용 수익률을 개선해 보겠다는 계산이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3월 코로나19 여파가 본격 확대되자 임시 금통위를 열고 기준금리를 1.25%에서 0.75%로 한 번에 0.50%포인트 인하하는 이른바 빅 컷을 단행했다. 이어 지난 5월에도 0.25%포인트의 추가 인하가 단행되면서 한은 기준금리는 역대 최저치를 다시 한 번 경신한 상태다. 우리나라 기준금리가 0%대에 진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울러 도입이 다가오는 새 국제회계기준(IFRS17)도 생보사들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2023년 IFRS17이 적용되면 현재 원가 기준인 보험사의 부채 평가는 시가 기준으로 바뀐다. 저금리 상태에서도 고금리로 판매된 상품은 가입자에게 돌려줘야 할 이자가 많은데 IFRS17은 이 차이를 모두 부채로 계산한다. 이 때문에 생보사들은 이미 IFRS17 관련 적립금을 쌓고 있는데, 이는 가뜩이나 영업이 어려운 와중 회사 성적에 추가적인 악재가 되고 있다.
이런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보험사가 현금을 확보해야 하는 까닭은 가입자들의 보험금 지급 요청에 대비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금융 불안이 커질수록 현금 보유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여파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는 와중, 현금을 축소하는 생보사들의 움직임 둘러싸고 바람직하지 못한 행보란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금융권 관계자는 "보험업계로서는 계약 해지율 상승에 따른 유동성 수요 급증에 대비해 보수적인 현금 보유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이라며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충격이 누적되고 있는 만큼, 생보사들의 현금 보유 비율 적정성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