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투자‧고용 구걸하지 말라더니 임기 막판 '구걸'
정부 주도 고용정책 실패 뒤늦게 인정한 꼴
차기 대통령, 문 정부 5년간의 실패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일을 실컷 망쳐 놓고는 “자 이제 네가 알아서 해봐”라고 한마디 툭 던지고 사라지는 직장 상사만큼 극혐인 이도 없을 것이다.
자기가 손을 댔으면 제대로 마무리를 하던가. 제대로 할 자신이 없다면 전적으로 맡기던가. 이 무슨 비효율과, 손실과, 분노를 유발하는 추태란 말인가.
지난 27일 6대 기업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나온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몫이고 정부는 최대한 지원할 뿐”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듣는 순간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극혐 상사’의 상황이 오버랩됐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일자리 정책에 있어 ‘정부의 역할’을 강조해 왔다. ‘기업의 몫’은 없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듬해인 지난 2018년 1월 청년일자리 점검회의에서 “각 부처에 ‘일자리는 민간이 만드는 것이다’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많이 남아있다”며 장관들을 질책했다.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한 문 정부의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역할을 했던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김진표 위원장은 출범 직후 기획재정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정부가 모범 고용주로서 나서야 한다”며 공공일자리 확대를 위한 추경 예산 확보를 독려하기도 했다.
2018년 8월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삼성전자 등 대기업들을 순회 방문하던 김동연 당시 경제부총리에게는 청와대로부터 “삼성에 투자, 고용을 구걸하지 말라”는 하명이 떨어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기업은 세금만 열심히 내라. 그 돈으로 채용을 늘려 생색내는 일은 정부가 할테니’라는 식의 철저한 정부 주도 고용정책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공공일자리 확대는 19대 대선 당시 문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는 공무원 17만명 증원을 비롯,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등 현실적으로 감당 못할, 심지어 본인 임기 때보다 후대에 더 큰 부담을 줄 공약들을 쏟아냈다.
취임 이틀 만에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대책 없이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지시해 지금까지 ‘공정을 가장한 최악의 불공정’으로 불리는 ‘인국공’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면서 민간 일자리 창출의 주체인 기업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했다. 오히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화학물질 규제법, 중대재해처벌법, ILO(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 등으로 투자하기도, 채용하기도 두려워지는 환경을 만들었다.
결국 문재인 정부 5년간의 일자리 정책은 처참한 결과만 낳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풀타임 근로자(15~64세) 기준인 주 40시간 이상 근로자는 문 정부 출범 첫 해인 2017년 2084만명에서 지난해 1889만명으로 195만명이나 감소했다. 그 사이 주 40시간 미만 단시간 근로자는 213만명 폭증했다.
비정규직을 없애겠다는 공약과 달리 비정규직 비율은 오히려 늘었고, 청년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공약이 무색하게 청년 고용률은 OECD 37개국 중 31위에 그쳤다. 통계상 수치를 높이겠답시고 막대한 혈세를 투입해 공공 일자리를 만들었지만, 대부분 풀 뽑기나 휴지 줍기 같은 단기 일자리에 불과했다.
5년 간 국민을 괴롭힌 뒤에야 정부 주도 고용정책의 과오를 깨달았는지 임기 막판에 이르러서야 부랴부랴 김부겸 국무총리를 대기업들에게 보내 청년 고용을 ‘구걸’했다. 3년 전 경제부총리에게 ‘구걸하지 말라’고 하명하던 것에서 180도 태세 전환을 한 것이다.
그리고 문 대통령은 대기업 총수들을 모아 놓고 일자리 창출의 책임을 떠넘기며 무책임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정부가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약속은 임기가 불과 5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는 조만간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한다. 5년 짜리 장기 시행착오를 또 다시 겪기에는 너무 지쳤다. 누가 되건 새 대통령은 문 정부의 앞선 일자리 정책은 타산지석으로 삼고 ‘일자리 창출은 기업의 몫’이라는 마지막 깨달음만 되새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