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밸류체인 묶여 독자 정책 추진 난항
한국의 제재 동참에 유감 표명한 러시아
러시아 진출 韓 기업, 경제적 피해 극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문재인 정부 들어 펼쳐왔던 신북방정책이 흔들리고 있다는 진단이다. 러시아를 비롯한 북방 14개 국가와의 경제 협력을 모색하고 무역 다변화를 꾀한다는 것이 신북방정책의 핵심이다. 그런데 러시아와 서방국가 간 갈등 양상이 심화되면서 글로벌 밸류체인에 묶여 있는 우리나라로서 이러한 독자적인 정책 추진은 사실상 어렵게 된 것이다.
정부는 지난 1일 미국이 제재 대상으로 정한 7개 주요 러시아 은행과 자회사와의 금융거래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3월부터 발행되는 모든 러시아 국고채에 대한 투자도 모두 중단하라고 국내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에 강력하게 권고한 상태다. 러시아 일부 은행을 국제금융결제망(SWIFT)에서 배제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정부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나서게 된 것은 인권유린 정도가 심각하다는 판단에서다. 이미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연합은 러시아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천명하고 공동행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상황이다. 국제사회의 강경 제재 속에서 우리나라도 힘을 모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한국경제연구원의 한 전문가는 "서방 동맹이 러시아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천명하고 공동행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상황이라 우리나라도 힘을 모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면서 "우리나라 입장에서 러시아와의 경제적인 관계보다 국제사회에서의 정치·외교적인 부분이 더 중요한 영역이다 보니 불안정한 정세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지에 난감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러시아 측은 벌써부터 유감을 나타냈다.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는 지난달 28일 국제사회의 대(代) 러시아 제재에 우리나라가 동참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신북방정책 덕분에 양자관계가 발전해왔다"면서 "(한국의) 제재 동참으로 양국의 발전적인 관계의 추세가 바뀔 것"이라고 밝혔다.
서방 제재에…러시아 현지 진출 기업 피해 극심
이러한 서방의 러시아 제재로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의 고심은 매우 크다. 부품 조달 자체가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러시아가 배제될 경우 우리 기업의 부품 대금결제 역시 지연되거나 중단될 우려가 있다. 여기에 루블화로 대금을 받아야 하는데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극심한 손해가 예상된다.
재계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기업은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LG전자 등 150여 개에 이른다. 특히 현지에서 공장을 운영 중인 현대자동차그룹은 당장 직접적인 피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는 반도체 수급 차질을 이유로 현지 공장 운영을 5일간 중단한다. 프랑스 르노 역시 같은 기간 러시아 공장의 가동을 중단한 점을 들어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추이를 지켜보기 위한 결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스위프트 배제로 대금 결제가 지연이나 중단될 경우 현지 공장 가동 중단은 사실상 예견된 수순이다. 이 경우 현대차에 부품을 수출하는 관련 기업들까지 연쇄 타격이 우려된다. 완성차를 포함한 자동차 관련 품목은 전체 대러시아 수출액 중 40%가 넘는다.
현대차는 러시아 공장에서 소형 세단 쏠라리스와 소형 SUV 크레타를 생산하고 있다. 쏠라리스의 경우 2016년 총 9만380대를 판매해 현지 브랜드를 제치고 베스트셀링카에 올랐다. 현대차 러시아 공장의 완성차 생산 규모는 연간 20만대에 이른다.
현대차는 사실상 비상체제에 돌입해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해결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스위프트 배제 조치 관련 아직 현대차의 입장은 따로 없다"면서 "조만간 어떤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고 말을 아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국제사회가 러시아를 전범국으로 낙인을 찍는 상황이다보니 이런 분위기에서 제재에 동참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라며 "현지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스위프트, 무역보험지원 등 다각도 선제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