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문화 기업 러시아서 철수
대중문화 부재에 한국 주목 …"조심스럽지만 적극적으로 시장 분석 필요"
콘텐츠 자체에만 의존하기 보다, 메시지 명확하게 알려야
2022년 2월, 러시아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다. 미국과 EU를 중심으로 많은 국가들이 정치‧경제는 물론이고 문화적 측면에서 러시아 규탄 대열을 만들고 있다. 특히 전 세계의 대중문화 최전선 기업들의 움직임은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유니버셜 픽쳐스, 워너브러더스, 파라마운트 픽쳐스, 월트 디즈니컴퍼니 등 글로벌 배급사들이 러시아 내 영화 상영을 중단했다. 글로벌 OTT 넷플릭스도 러시아 콘텐츠 공급을 멈췄다. 러시아 영화 관계자들은 향후 1~2 년 동안은 해외 영화 배급사들이 러시아로 돌아올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70% 이상이 할리우드 작품이었다. 러시아 자체적으로 영화 콘텐츠 수급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이에 러시아 영화 시장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영화 연구기관 Nevafilm Research에 따르면 2022년 상반기 러시아 내 영화관 수는 1월 1일 기준 2161개에서 7월 1일 6.4%가량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20년 팬데믹 당시 운영하지 않은 영화관 수를 경신한 수치다.
또한 2022년 7월 기준, 인구 백만 명 이상의 도시에서의 상영관 폐업률이 러시아 전체 상영관 폐업률(16%)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옴스크, 사마라에서는 30%를 기록했으며, 크라스노다르에서는 20% 이상을 기록했다. 수도인 모스크바에서는 16%, 문화 수도로 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14%의 폐업률을 기록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러시아 영화관을 채우려면 연간 200~250편의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 내에서는 160편 정도가 촬영 중이다. 외부 수급이 안되니 자체 제작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어찌 보면 영화 투자를 통해 이익을 올리려 하는 국가나 회사들에게는 기회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김시우 러시아 마케터는 “뛰어난 프로덕션 기반을 가진 우리나라에는 이것 또한 보이지 않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러시아의 유명 제작사가 기존의 제작 파트너들인 유럽 프로덕션과 협업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자 드라마 배경음악 구입하기 위해 한국 프로덕션 기업을 찾고 있다. 제조업과 비교한다면 삼성전자의 패널이 중국의 스마트폰에 쓰이는 것처럼, 세계 수준의 최종제품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우리 기업들이 러시아에 중간재를 판매하는 새로운 시장을 구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이 같은 글로벌 그룹의 부재는 아시아 콘텐츠들이 부상할 수 있는 틈새가 됐다. 팬데믹으로 비대면이 일상화되며 OTT 시장이 급성장한 것. 러시아의 OTT 시장 규모는 2020년 말 60% 증가해 230억 루블 규모를 기록했다. 이용자 규모는 17%가 증가한 6400만 명이다. 러시아 현지 OTT 기업은 매력 있는 콘텐츠 수급이 필요한 상황이 됐고 한국의 콘텐츠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6월 기준 러시아 주요 OTT에 등록된 한국 콘텐츠 수가 ivi 260개, 키노포이스크 198개, OKKO 146개, 윙크 180개, 프리미어 61개로 전년 동기 대비 1.4배에서 2.3배 증가했다.
러시아 문화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아시아 영화가 서방의 영화를 대체할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러시아 대표적인 미디어 그룹 Gazprom-Media의 총책임자가 제재 이후 가장 유망한 시장으로 한국을 언급했다.
러시아 OTT ivi CCO 이반 그린닌은 "최근 터키 시리즈나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인의 2%가 한국 드라마를 즐겨본다. 사실 2%가 그렇게 큰 숫자는 아니지만, 2년 전에는 0%였기 때문에 유망한 분야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인의 2%면 100만 명이다. 앞으로 더 많은 한국 콘텐츠를 서비스하고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케이팝 지속 위한 방안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케이팝(K-POP)에도 영향을 미쳤다. 차근차근 러시아 대중들의 마음을 잡아가던 케이팝 가수들이 현지에서 공연을 개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러시아 케이팝 팬들은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글로벌 오디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 가 공개한 '2021 Wrapped 연말 결산'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러시아 랩, 해외 랩으로 나타났고 해외 팝, 러시아 팝이 그 뒤를 이었다. 랩을 좋아하는 만큼 모르겐스테른(MORGENSHTERN), 스크립토나이트(Scriptonite)와 같은 러시아 래퍼들이 2021년 가장 많이 스트리밍 된 Top5 아티스트들에 포함됐는데 여기에 한국의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이 7위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케이팝 페스티벌이 그대로 진행되거나 새로운 행사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케이팝 경연 대회 ‘IdolCon’은 아이구 러시아가 주최하는 행사 중에 제일 큰 행사로 2011년부터 1년에 1~2번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올해 2022년 5월로 14회를 진행했다. 보통 경연 참가자는 500명, 방청객은 1000명 정도다.
지난 4월에는 한 클럽에서 케이팝 파티가 진행됐다. 150~200명의 젊은 여성들이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스트레이키즈, 트와이스 등 유명 케이팝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춤을 추고 즐겼다.
'프리벳: 코리아'(PRIVET KOERA) 송하린 디렉터는 "파티 마무리 노래로 방탄소년단 진의 슈퍼 참치가 나오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그의 손동작을 따라 하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케이팝이 러시아에서 인기가 있었는지 그저 신기하고 놀랄 따름이었다"라고 전했다. 이외에도 루비포리아(Rubiforia)와 아시안 나이트(Asian Nights)가 주최하는 케이팝 파티도 있다.
송하린 디렉터는 "한류의 촉진이 된 방탄소년단, '오징어 게임'의 성공으로 러시아 내에서도 한류와 케이팝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높아진 시기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한 일반 정보뿐 만 아니라 현지 한류 현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신뢰할 수 있는 현지 협력 업체를 찾지 못해 한국 업체들이 러시아 진출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라며 "러시아에 진출하고자 하는 한국 업체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여 케이팝 청취자들을 위한 콘서트 기회 확대 등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케이팝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지금의 한류 열기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박정곤 러시아 민속학자는 러시아가 대한민국 국토의 약 180배에 달하는 영토를 가졌고, 세계 최대 다민족 국가인 만큼 한류가 모스크바 중심이 아닌 지역으로 뻗어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의 지역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해당 지역에 걸맞은 한류 전파가 이루어진다면 가시적인 성과는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가령, 최근 야쿠티야 지방에서는 한식문화가 성장하고 있으며, 한국 식품 가게 및 한식당 체인이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반면 야말을 비롯한 러시아 북부지방에서는 이제 막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는 추세다. 이처럼, 민족적, 지리적 그리고 종교적 특성을 잘 고려하여 보다 신중하게 접근한다면 한류의 성장곡선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전망했다.
"문화 전파와 성장, 정치 논리에 따라 멈추면 안 돼"
중앙대학교 국제대학원 전혜진 교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바라보는 시선과 문화를 대하는 자세는 달라야 한다는 시각이다. 전 교수는 "이번 전쟁을 푸틴이라는 정치인에 의한 러시아의 상황으로 봐야 한다. 많은 러시아인들의 생각은 푸틴과 일치하지 않는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정치와 문화 경제에 변별력 있는 접근 시도가 필요해 보인다. 러시아인들 역시 각국의 압박으로 경제가 힘들어지면서 매력적인 문화 예술 창조 상품을 찾을 것이다. 지금 시점이 케이콘텐츠를 수출할 수 있고 이에 따른 울림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전 교수는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장려할 수는 없어도 민간 기업의 진출은 열려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우리나라는 러시아에서 대부분의 원자재를 수입하고 전자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무역구조의 다변화를 시도한 시점에서 공통분모를 콘텐츠 산업에서도 찾아야 한다. 현재 문화 콘텐츠 산업과 육성에 크게 비중을 두고 있다. 팬데믹과 전쟁이 일어나도 콘텐츠에 대한 니즈는 늘어나고 있다. 문화 예술 산업 성장이 느릴지라도 마이너스는 보여주지 않고 있다. 러시아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라며 "러시아의 위상이 추락한 게 사실이도 문화 강국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 중심이 콘텐츠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창조산업을 필요로 하고 있다. 시기, 경제적인 측면에도 서로 원하는 바가 맞닿아 있어서 조심스럽지만 적극적으로 러시아 시장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타깃으로 하기보단, 지방 진출 노력이 필요성을 강조하며 "다수의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 중심이 정답일 수 있으나, 투자와 시장 진출에 용이함이 있다. 그러나 한류 콘텐츠가 숨은 지방 시장을 장악하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 더 큰 미래를 봤을 때는 반드시 진출해야 할 곳이다"이라고 조언했다.
전 교수는 정상적인 콘텐츠 수출과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한국 콘텐츠가 유통될 것이라고 전했다. 전 교수는 "지적재산권 사각지대에 있는 나라 중 중국이 1등이라면, 러시아는 2등이다. 자국의 지식 재산권에 대한 규정은 엄격하지만 해외 콘텐츠에 대해서는 미흡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걱정되는 건 러시아 업계에서는 불법 유통의 수치를 문제로 인식하기보다는 소비 추세라고 생각해 긍정적인 측면으로 본다"라고 우려했다.
박정곤 민속학자는 “아직 성급한 부분이 있지만,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상당 부분 수혜를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오코(Okko)와 ivi 같은 러시아 최대 스트리밍 회사들은 보다 많은 한국 콘텐츠를 수용하고자 문을 더 열고 있으며, 코카서스 일대는 한국 화장품 품귀 현상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흑해 일대에서는 러시아인 한식 전문 조리장과 김치 장인마저 활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라며 “이처럼 한류가 차지하던 ‘파이’는 서방의 빈자리를 대신해 점점 더 커지고 있으며 그 성장 속도도 더욱 빨라지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가령 머지않아 제재가 풀린다고 가정해 본다면, 분명 러시아 내 한류는 위기를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서방의 수많은 콘텐츠들과 경쟁해야 할 터이고, 막강한 자본에 의존한 거대 기업들로부터 위협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왔을 때 가장 큰 방호막이 되어줄 것은 결국 러시아인 스스로가 가진 한류에 대한 애착이다. 분야에 상관없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인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콘텐츠를 생산하고 토착화하여 러시아 저변에 뿌리 깊게 확산시켜 놓는다면 향후 10년, 20년이 지나서도 한류는 지속될 것으로 본다”라고 전했다.
그는 “이를 위해 단순히 케이팝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한류 전반에 내재된 ‘한국 정서’를 보다 잘 이해시켜야 할 것이고,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현대적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두루 소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한류의 원류는 무엇이며 오늘날 한국 콘텐츠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야 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러시아 내부망의 확산과 자국 콘텐츠 개발에 주력하는 현 상황을 고려하여 음원과 게임, 스트리밍 분야에서는 현지화를 위해 현 수준 보다 적극적인 투자를 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라고 조언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정보 부족에서 오는 진입장벽을 해소하기 위해 콘텐츠 시장에 대한 신속한 뉴스와 더불어 우리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는 현지 정보를 발간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김시우 러시아 마케터는 “러시아에서 발생하고 있는 한국 콘텐츠에 대한 수요를 한국의 기업에게 연결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이번 사태로 활동에 어려움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저 또한 전쟁에 반대하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당사자인 나라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가 개인적인 딜레마가 되고는 한다. 하지만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과거 러시아에 보여준 의리가 지금의 한국 기업의 위상을 만들었던 것처럼, 외국기업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 우리나라 정부기관인 진흥원이 떠나지 않고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믿음을 얻고 있다. 이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나면 우리나라 콘텐츠가 러시아에서 더 큰 환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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