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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속 장소 이야기⑪] 경복궁 속의 고종의 공간, 건청궁


입력 2022.12.13 14:04 수정 2022.12.13 14:04        데스크 (desk@dailian.co.kr)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서 왕비가 살해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가 주도하여 일으킨 것이었다. 고종은 다행히 화를 면하였지만, 더 이상 경복궁의 거처에서 안위를 보장받기 어렵다는 것 역시 분명하였다. 어쩌면 심정적으로 지금까지 함께해온 왕비가 참혹하게 살해 당한 장소에서 더는 지내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이런 심정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일까? 일부에서는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출발한 곳을 덕수궁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승정원일기> 등을 살펴보면 1896년 2월 10일 아관파천 직전까지 고종은 경복궁에 있었다.


북궐도형 건춘문, 춘생문, 계무문, 건청궁 위치 (원형 표시 필자,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일제강점기 건춘문 정측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건춘문과 삼청천, 북촌으로 넘어 갈 수 있는 다리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아관파천 당시 고종의 행적에 대해 명백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한말 재야 문인으로 유명한 황현은 그의 <매천야록>에서 '이범진 등은 교자 두 채를 세내어, 왕과 태자를 태워 아국 공관으로 옮겼다'라고 기록하였다. 당시 관리였던 정교 역시 <대한계년사>에서 '궁녀의 교자를 타고 건춘문을 빠져나갔다'라고 하였다. 윤치호도 일기에서 고종이 나인의 가마를 타고 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적었다. 이러한 기록에서 공통점은 고종이 궁녀 등으로 변장하고 몰래 경복궁을 사실상 탈출했다는 것이다.


을미사변을 거치면서 고종은 신변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궁궐에서 일하는 이들조차 신뢰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종은 음식조차 독살을 우려하여 선교사들이 준비한 것만 먹었다. 여기에 암살 등의 위협에 대비해 언더우드 등은 궁궐에서 숙위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교사 등 일부에게 의존하여 안전을 도모하는 것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색이 구체화한 것이 그해 11월 28일(양력) 일어난 춘생문 사건이다.


춘생문 추정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을미사변 이후 친일 세력은 고종을 사실상 경복궁에 감금하고 감시하였다. 이에 고종 측근 세력을 비롯하여 개화파, 친미, 친러 등 반대 세력과 근왕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모여 고종 탈출이라는 목적을 위해 협력하였다. 이들은 비밀칙지로 친위대를 움직여 고종을 구출하기로 계획하였다. 고종의 측근이었던 임최수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궁성을 호위하고 역적들을 토벌하라'는 밀지를 평양진위대 대대장 출신의 이도철 등에게 전달하여 거사를 모의하였다.


이도철 등 거사 주도자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우선 거사에 동별영 시위대를 동원하여 입궐하기로 하였다. 이와 함께 궐내에서는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 등이 거사에 호응하여 춘생문을 여는 것으로 계획하였다. 11월 27일 밤에 임최수, 이도철, 김진호 등은 훈련원에서 모여 동별영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고종의 밀지를 근거로 친위대 2개 중대를 움직여 건춘문을 거쳐 춘생문 쪽으로 향하였다.


임최수, 이도철 등이 이끄는 친위대가 춘생문 앞에 도착해 궐내의 호응을 기다렸지만, 끝내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궐내에서 호응하기로 한 친위대 대대장 이범래가 거꾸로 해산을 권유하였다. 결국 이도철 등은 병력 중 일부를 이끌고 돌입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궐내에 대기 중이던 일본군의 공격에 결국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최수를 비롯하여 이도철 등 33명은 모반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결과 임최수와 이도철은 모반률로 교형을 언도받았고, 그 외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이들은 종신 유배형 등 중형에 처해졌다.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출처 : M. Courant, Souvenir de Séoul, Corée(1900))


집옥재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팔우정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을미사변 당시에도 일본군과 일본 낭인 무리는 경복궁 북쪽에서 침입하였다. 당시 고종이 머물던 공간이 바로 경복궁 북쪽에 자리한 건청궁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남아있던 경복궁을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중건하였지만, 1873년 고종은 친정을 시작한 이후 경복궁의 가장 북쪽에 새로 건청궁을 지었다.


어찌 보면 그 넓은 경복궁 안에 고종을 위한 공간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건청궁 안에서 고종이 머무는 공간은 ‘오랫동안 평안하게 지내다’라는 의미의 장안당이라 이름하고, 왕비가 머무는 곳은 ‘땅이 편안하다’는 곤녕합이라 이름 지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공간에 침범하여 왕비를 시해한 것이 을미사변이고, 비록 그 진위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춘생문 사건 당시 고종의 밀지가 탈출이 아닌 궁성을 호위하도록 한 것 역시 그런 이유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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