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중독증은 쉽게 낫지 않는다
대통령 행세하는 사람이 누군데
와룡 건드렸다 낭패 보기 싫으면
윤석열 전 대통령을 파면한 헌법재판소 선고문의 결론이다. 헌재 재판관 8명의 이 예언적 단정이 훗날 어떻게 판가름 날까? 국민과 역사의 법정에서는 어떤 판결문이 쓰일지 궁금해진다.
어쨌든 더불어민주당으로서는 실로 오래고 집요했던 투쟁 끝에 현직 대통령을 자리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지금 이미 윤석열 전 대통령은 그 직을 상실했고 대한민국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정작 대통령 행세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다. 이 대표와 그가 이끄는 민주당은 입법부는 물론 행정부·사법부까지 휘하에 거두어들인 듯 기세등등하다.
탄핵 중독증은 쉽게 낫지 않는다
한 대행은 민주당의 주도로 이미 탄핵소추를 당한 바 있다. 오랜 직무정지 끝에 탄핵소추가 기각돼 직무에 복귀한 지 오늘로 16일째다. 민주당은 헌재가 한 대행에 대한 판결을 하기도 전에 대행의 대행 임무를 수행했던 최상목 경제부총리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그 며칠 후 한 대행이 정부에 돌아오자 다시 탄핵 엄포를 놓고 있다.
이쯤 되면 탄핵의 관성화 혹은 중독증이다. 중독증은 쉽게 낫지 않는다. 한 대행이 복귀했으니 최 전 대행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철회해야 옳다. 더욱이 한 대행이 8일 마은혁 후보자를 헌재 재판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최 부총리 탄핵소추의 핵심적 이유는 해소됐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고삐를 안 놓고 있다.
나머지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에 가담 △마용주 대법관 후보자 임명 거부 △내란 상설특검 임명 절차 불이행 가운데서 마 대법관 임명도 이뤄졌다. 2개의 이유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지난 4일 본회의에서 처리한다고 을러대더니 방침을 바꿔 법사위에 회부했다. 윤 전 대통령이 헌재에 의해 파면된 날 민주당이 최 부총리 탄핵소추안을 의결해 직무를 정지시켰다면 국민의 탄핵 피로감은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었다.
트럼프 발 경제위기로 세계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경제 컨트롤타워의 손발을 묶어버릴 때 그 책임은 전적으로 민주당 몫이 된다. 이는 이재명 대표에게 악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가 표결을 만류했던 모양인데 그렇다고 아예 철회할 민주당이 아니다. 법사위에 넘겨 조사도 하고 청문회도 하면서 계속 정부를 겁주겠다는 심산이다.
민주당의 탄핵 시리즈가 이로써 중단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마 재판관 임명을 미룬다며 한 대행에 대해 재탄핵 겁박을 하더니 윤 전 대통령 파면으로 일단 보류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한 대행이 이완규 법제처장과 함상훈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문형배·이미선 후임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한 것에 놀라서 다시 탄핵 카드를 내밀고 있다.
민주당 이 대표는 이날 한 대행의 인사 발표에 대해 “자기가 대통령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라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대통령 행세하는 사람이 누군데
윤 전 대통령의 계엄선포 및 해제 이후 대통령 행세를 한 사람이 누구더라? 자신만으로도 대통령 된 착각은 충분하니까 한 대행은 끼어들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일까? 대통령을 호랑이로, 한 대행을 토끼로 비유한 것도 상상력의 빈곤이거나 교만이다. 그렇다면 이 대표 자신은 무엇에 비유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온순하고 약한 토끼는 아닐 테고, 살쾡이나 여우? 호랑이 행세를 하고 있지만 호랑이는 아니니까.
‘선출된’이라는 표현을 유난히 강조하는데 이런 화법은 노무현 전 대통령 정부·여당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주로 언론을 공격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 그의 각료 및 참모들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공격한다고 해서 분개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런데 지금 이 대표와 민주당은 자기들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그런 표현으로 낮잡아본다.
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법적 지위와 권한을 모르는 양해서는 곤란하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글자 그대로 대통령의 권한을 대신해서 행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선출된’ 총리든 ‘임명된’ 총리든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권한을 대행하게 됐으면 국회와 정당들로 당연히 그 지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대행할 수 있는 권한, 없는 권한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글자 그대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이다.
권한대행이니 헌법재판관 후보자 지명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어떤 법에 근거한 것인가?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서면질의에 대해 마 재판관 임명은 대통령의 헌법상 의무이며 권한대행도 같은 의무를 진다고 답변한 게 지난 7일이다. 바로 다음 날 한 대행은 그간 민주당이 주장해온 헌법상 의무를 다했다. 민주당이 추천한 마 재판관을 임명하고 대통령 몫의 두 후보자를 지명한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원천무효’라며 ‘권한쟁의 심판 및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공언했다. ‘재탄핵’ 카드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고 들린다. 민주당 출신의 우원식 국회의장도 이날 “이완규·함상훈 인사청문요청서를 접수하지 않겠다”라고 거들었다.
와룡 건드렸다 낭패 보기 싫으면
한 대행은 △대선 관리 △필수 추경 준비 △통상현안 대응 등을 위해 헌법재판관 후보자 지명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경제부총리가 탄핵 소추될 수도 있는 상황이고, 경찰청장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때다. 헌재에 결원 사태가 생기고 그 때문에 헌재의 결정이 지연될 경우를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 한 대행의 인사 강행 배경이다.
이처럼 절박한 국가적 과제들을 외면하고 민주당이 헌재 재판관 충원을 가로막고 나서는 까닭은 뻔하다. 한창 대통령 노릇에 신이 난 이 대표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거 대통령 임명 몫이잖아. 이 대표가 대통령 취임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렇게 말하고 싶은듯한데 정말 그렇다면 이야말로 나라 망칠 생각 아닌가. “설마 그건 아니겠지”라고 그 절망적 상상을 스스로 부인할 수밖에. 그렇다면 민주당의 진심은 무엇인가?
민주당은 여전히 탄핵 중독증과 결별한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대선을 목전에 두고 있는 만큼 민심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다고 탄핵 카드를 버릴 사람들이 아니다. 너무나 탄핵소추에 재미 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헌재까지도 그건 탄핵소추권의 남용이 아니라고 힘을 실어 줬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탄핵소추를 의결하는 일은 없겠지만 정부에 대한 위협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실익 때문만이 아니다. 관성이 되어 ‘내친 김’에 내달리는 것이다.
한 대행으로서는 민주당의 탄핵 압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탄핵소추를 하겠다고 하면 즉시 사퇴하고 국정 방해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대선전에 뛰어들면 된다. 자신은 “대선의 ‘ㄷ’도 꺼내지 말라”고 참모들을 신칙하는 모양이지만 그게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일이라면 한사코 거부할 일은 못 된다. 아마도 한 대행이 대선에 나서는 일은 없겠지만 민주당은 그 가능성 때문에라도 탄핵을 시도하진 못할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지식과 경험과 역량의 측면에서 한 대행과 견줄만한 사람이 민주당 안에 있기나 한가. 와룡(臥龍: 누워있는 용)을 괜히 건드렸다가 낭패당할 생각이 아니라면 탄핵소추·권한쟁의 심판·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따위는 지금 바로 접을 일이다. 그게 싫으면 한 대행을 대선판으로 몰아넣어 이 대표와 겨루게 하든가.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