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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사무총장 김윤덕 이야기


입력 2024.05.28 07:07 수정 2024.05.28 11:00        데스크 (desk@dailian.co.kr)

민혁당 전북지역 책임자…‘총장 자동차 방화사건’ 연루

전북지역 15개 대학을 단일한 대오로 통합

조직은 ‘반미구국학생동맹’으로 민혁당과 관련

학생운동 일원 명예는 간직…주체사상 조직 책임자 숨겨

김윤덕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 뉴시스

지난 4월 10일 총선이 끝나고 6월 1일이면 22대 국회가 시작된다. 22대 국회를 맞아 여야의 라인업이 짜지고 국회의장단이 선출되었다. 22대 국회에서도 민주당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운동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국회의장 우원식, 국회 부의장으로 사실상 내정된 이학영 모두 운동권이고 당내에서는 사무총장 김윤덕, 정책위의장 진성준 등이 운동권이다. 이 중 특별한 인물은 이학영과 김윤덕이다. 이들은 운동권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경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김윤덕에게 집중해 논의를 이어가 보겠다.


1980년대 광주사태 이후 친북 지하운동은 북한과 신세대 주사파 사이의 연계를 통해 진행된다. 90년대 초반 남한에는 적어도 5개의 대남 선이 가동되고 있었다. 각각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중부지역당·구국전위·왕재산·일심회이다. 이 중 가장 크고 대표적이었던 조직이 민혁당이다.


민주당 사무총장이 된 김윤덕은 민혁당 전북지역 책임자로 알려져 있었다. 필자는 여러 명으로부터 이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반면 일반적으로는 김윤덕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다.


그럼 김윤덕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2019년 펴낸 “김윤덕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이 과거를 회상한다.


전북대 85학번이었던 김윤덕은 자신의 학생운동 경력에 대해 117~136쪽에 걸쳐 매우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985년 가을 2학년일 때 ‘총장 자동차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투쟁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구속된 후 군대에 갔다. 제대한 후 89년부터 다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비공개 조직의 대표”가 되었다. 이후 전북지역 대학 15개 대학의 개별 운동조직들을 통합해 “나는 지휘체계가 통일된 전북지역 학생운동 조직을 구축”했다고 적고 있다.


평가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비공개 조직의 대표 이전의 학생운동 경력은 별것이 없다. 20쪽에 걸쳐 학생운동 경력을 소개했지만 대부분 주변 상황에 대한 기록일 뿐 원천 내용 자체가 빈약하다. 대부분 경력은 시시콜콜한 지루한 묘사로 비유하자면 정청래 의원 자신의 학생운동 경험담 회고와 유사하다.


둘째. 하이라이트는 89년 제대한 후 전북지역 15개 대학을 단일한 대오로 통합한 부분이다. 이런 수준의 업적은 비록 전북지역이라는 작은 지역단위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전무후무한 조직 성과이다.


학생운동은 80년대 후반 다양한 정파·조직·지하당이 경합했다. NL(민족해방, National Liberation)과 PD(민중민주, People’s Democracy)가 있었고 반미청년회. 자민통(자주·민주·통일) 그룹. 관악 자주파가 있었으며 민혁당과 중부지역당이 충돌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북지역이라는 작은 지역이지만 단일한 지도체계를 구축했다는 것은 기념비적인 성과라 할만했다. 나도 대충 그렇게 전해 들었기 때문에 김윤덕의 기록은 과도하지 않은 것 같다.


셋째. 그렇게 해서 20쪽에 걸친 학생운동 과정에 대한 묘사, 긍지가 넘치는 자평을 해놓고는 그 단일한 지도체계를 가진 조직의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고 있다. 필자는 그 조직을 ‘반미구국학생동맹’이라고 들었고 그것은 민혁당과 관련이 있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와 연관해 김윤덕 의원이 민혁당 전북지역 책임자라고도 들었다.


넷째. 김영환이 민혁당을 해산할 때 경기동부와 부산·울산은 민혁당 잔류를 선언한 대신 전북지역은 전체적으로 김영환에게 동조하게 되는데 전북지역이 김영환 노선에 전체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위와 같은 선행 작업(지도체계 통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에서 다시 논의를 이어간다면 왜 마지막 순간에 조직의 이름, 그리고 자신의 정확한 지위를 밝히는 것을 주저했는가이다.


먼저는 그는 여전히 정의와 양심에 넘치는 학생운동의 일원이라는 명예는 간직하면서 주체사상 조직의 책임자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연장선에서 민혁당이 거론되면 민주당에서 자신의 지위가 흔들린다고 봤을 것 같다. 민주당의 분위기는 설사 전향했다고 하더라도 민혁당 성원이었음을 밝히는 것은 넓은 의미의 변절로 보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운동 경력을 정리하면서 “20대 청춘을 불꽃처럼 살았던 학생운동 시절은 나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다. 그리고 내 삶의 원천이 되고 있다”라고 글을 맺고 있다.


그의 학생운동 경력은 평가해 줄만 하다. 그러나 그런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태도는 동의하기 어렵다. 모름지기 일기·회고록·자서전 그리고 역사 기록을 쓸 때는 최소한의 진실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자신의 편의에 따라 취사선택한 기록에 우리는 일기, ‘김윤덕 이야기’ 같은 이름을 붙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구미에 맞게 선택적으로 기록한 자서전을 두고 그는 말미에 “불꽃처럼 살았고”, “나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며 “내 삶의 원천”이라는 자평을 실어 놓고 있다. 그런 말이 성립되려면 반미구국학생동맹과 민혁당 전북지역 책임자에 대한 자신의 사상궤적이 어떠했는가를 밝히는 것이 온당하다. 그게 아니라면 학생운동에 대한 자서전 기록은 남기지 않는 것이 좋다.

글/ 민경우 시민단체 길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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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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