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바둑의 위상을 올려놓은 바둑 기사 조훈현, 이창호 사제지간의 이야기가 스크린에서 다시 태어났다. 이병헌은 한국 바둑의 전설, 조훈현을 연기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지만 그의 앞을 가로막은 도전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제자, 어린 이창호였다. 그날, 조훈현의 마음속에는 어떤 파장이 일었을까. 이병헌은 그 복잡다단한 내면을 치밀하게, 때론 담담하게 그려냈다.
사실 이 영화는 처음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었지만, 유아인의 마약 파문으로 인해 공개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극장 개봉이라는 '수'를 두며, 관객과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승부'는 주연 배우 유아인 리스크를 딛고, 누적 스코어 48만 명으로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극장에서 보인다는 것 자체가 너무 기뻐요. 함께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기쁠까란 생각을 하니 더욱 신났다. OTT도 장점이 있지만 극장이란 공간을 너무나 좋아하는 저로서는 스크린에서 선보일 수 있어 기분이 좋습니다."
요즘 관객들에게 바둑이라는 소재는 다소 낯설고, 흥미를 끌기 어려운 주제일 수도 있다. 특히 MZ 세대에겐 더 그렇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그 자체만으로 관객을 설득하기엔 무게가 필요하다.
"감독님뿐만 아니라 메인 캐릭터 모두 바둑을 몰라요. 그런데 왜 출연을 결정했겠어요. 바둑은 소재일 뿐이지 바둑에 대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거든요.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거든요. 실화가 주는 감동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퀸스캠빗'을 볼 때 체스를 어떻게 두는지 다 알고 보는 건 아니니까요."
실제 바둑을 모르는 배우들은 기본적인 규칙을 배우긴 했지만,복잡한 경기와 심리전의 공기를 연기해 내기 위해선 도움이 필요했다.
"촬영할 때 프로 바둑 기사분이 늘 와계셨어요. 경기의 중요성이나 어느 정도 심각한 상황인지 다 설명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걸 이해하고 어느 정도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연기했죠."
이병헌은 실제 조훈현 9단을 여러 가지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영화가 완성된 후에도 만나 자신과 많이 닮아있다는 칭찬을 듣기까지 했다.
"처음 만났을 때 농담처럼 '바둑돌을 아무렇게나 놓지 말아 달라'라고 하시더라고요. 벽에 딱 달라붙는 것 같이 바둑돌을 놓는 방법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바둑돌 놓는 방법부터 바둑돌이 빽빽하게 쌓여있을 때 돌들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방법, 끝나고 내 돌을 가져오고 상대방을 밀어주는 손놀림 등을 연습을 많이 연습했어요. 시사회 때도 오셨더라고요. 잘 봤다고 인사하시면서 '난 줄 알았다'라고 말씀해 주셔서 기분 좋았어요."
조훈현 9단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인물이다. 배우로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또 다른 부담이자 책임일 수 있다.
"사실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땐 많이 기댈 수 있어 좋아요. 실체가 안 보이는 과거의 인물을 연기할 때 '이렇지 않았을까?'라고 불안한 상상만 가지고 해야 하거든요. 조훈현 9단은 실존 인물이고 여전히 활동하셔서 자료가 방대해서 큰 도움이 됐죠."
조훈현이 패배 후 홀로 숨을 고르던 그날, 그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내기 위해 이병헌은 수없이 테이크를 반복했다.
"자기가 키운 제자가 결승에 올라온 판을 보면서 웃을 수만은 없었을 거예요. 그런 감정이 이 드라마의 시작이죠. 조훈현 선생님께 그때 어땠냐고 여쭤봤더니 전혀 질 거라고 생각 안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패배한 후 기자들 앞에서 '이창호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라고 말하지만 삐질삐질 새어 나오는 당혹스러움은 본인도 컨트롤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영화적인 설정이지만 빠져나오면서 이창호 아버님을 마주치는데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내려고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숨을 내쉬고 허공을 바라보잖아요. 이 과정의 표현이 고민스러웠어요. 그래서 유독 테이크를 많이 간 신이기도 하고요. 며칠 후 감독님께 재촬영하실 마음은 없냐고 묻기도 했어요. 당혹스러움이라고 간단하게 표현하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가지 만감이 있지 않았을까 고민하며 연기했던 기억이 나요."
4년 전 촬영한 '승부'는 유아인의 마약 혐의로 인해 개봉이 무기한으로 연기됐었다. 이병헌은 유아인과 함께 연기했던 때를 떠올렸다.
"영화 촬영 때 말수가 적은 친구였어요. 돌이켜보면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나서 자기 역할을 잘 해냈다고 생각했어요. 조훈현은 공격적으로 할 말을 다하고 바둑에서도 성격이 드러나는데 이창호는 단단한 수비를 하는 인물이거든요. 그런 순간을 함께 연기하며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비가 재미있게 비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배우로서 이병헌에게 '조훈현 9단'처럼 되고 싶었던 롤모델이나 스승, '이창호'처럼 자신을 위협하는 후배가 있는지 물었다.
"각자만의 장점을 살려 연기하는 후배들이 너무 많아요. 이제 '누가 제일 연기를 잘한다' 이런 이야기를 못하겠더라고요. 어떤 사람의 연기를 볼 땐 '나는 저렇게 못하겠다'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다 각자 최고인 것 같아요.(웃음). 반대의 입장에서 20대 초반에 만나 무서웠고 그분처럼 연기해야지 생각했던 건 박근형 선생님이었어요."
이병헌은 1991년 데뷔해 배우로 34년을 지내왔다. 과거와 현재 배우로서 가장 달라진 지점은 '여유'였다.
"아내에게 '어렸을 때 내 팬이었지?'라고 물어봤는데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과 제일 반대되는 지점의 사람이었다'라고 하더라고요. 거짓말하지 말라니 저의 건강해 보이는 웃음 자체가 싫었대요.(웃음) 그 이야기 듣고 오랜만에 어린 시절 사진 보니 아내가 말한 거부감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그 당시는 여유 없이 열정이 가득했던 때거든요. 연기할 대 여유가 없었어요."
이창호가 바둑을 통해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듯, 배우에게도 연기를 하며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질문들이 있다. 이병헌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가고 있을까.
"연기는 다른 대중예술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연기를 잘하기 위한 솔루션이 없거든요. 이것만 하면 잘할 것 같거나, 이걸 노력하면 연기가 확실히 좋아지는 그런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갈피를 못 잡는 경우가 많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냥 막연하게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야 하니 많은 관찰을 하고, 왜 이런 사람에게 이런 습관이 생겼는지 유추하는 방법밖에 없죠. 좋은 책, 좋은 영화 많이 보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인간을 더 넓게 인간을 이해하게 해줘요."
한국 영화계가 침체기를 겪는 가운데, '승부'는 당초 OTT 공개가 논의됐지만 최종적으로 극장 개봉을 택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그만큼 스크린에서 관객을 만난다는 데에 의미가 크다.
"극장이 너무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이 영화로 한국 영화 붐이 시작될까라고 전망하는 기사들도 읽었어요. 그 기사를 보는 순간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좋은 영화라면 결코 관객에게 배신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