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품만 있다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 됐다"
배우 정은채가 쿠팡 오리지널 시리즈 '안나'로 대중에게 새로운 연기를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안나'는 사소한 거짓말을 시작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정은채는 극중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거수일투족을 유미에게 패배감을 안기는 현주를 연기했다. 정은채는 현주가 다른 악역들과 달리 치밀하게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 아닌, 배려도 악의도 없는 행동으로 유미를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정은채는 '안나'의 시나리오를 받은 후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 시기에 읽었던 작품 중 단연 돋보이는 글이었다. 스토리가 촘촘했고 인물의 묘사가 세밀했다고 떠올렸다. 정은채는 자신이 현주의 예측불가한 모습들에서 퍼져나가는 나비효과가 '안나'의 재미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현주는 어떤 행동을 할지 가늠이 안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매신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공기를 환기시키고 싶었죠. 유미를 연기하면서 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고 재미있는 지점들이 많을 것 같아 출연했어요."
'안나'가 공개된 후 정은채를 향한 호평이 이어졌다. 정은채는 도회적인 외모와 차분한 이미지를 이용해 고급스러운 비주얼을 완성한 후, 악의 없지만 상대방을 자꾸만 작아지게 만드는 말투와 톤, 행동들로 현주의 존재 이유를 완성했다.
"주위에서도 연락이 많이 오더라고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 연기톤이 달라서인지 신선한 피드백이 많았어요. 저는 목소리, 톤과 어법이 사람의 성격을 크게 반영한다고 생각해요. 초반 현주는 톤이 높아 붕 떠 있는 느낌이 강했어요. 그런 부분을 강조해서 연기했고 후반부는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도록 더 무게감을 목소리에 실었어요. 그런 식으로 디테일하게 캐릭터에 변화를 줬어요."
목소리와 톤과 함께 신경 썼던 점은 현주가 태생부터 타고난 '여유'였다.
"몸쓰고 감정을 표출하는 제스처는 거의 애드리브였어요. 여기에 대사에 조금 더 활기를 넣어서 인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었고요. 그리고 현주는 위기나 유머러스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여유가 있잖아요. 이런 걸 준비하기도 하고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했죠."
정은채는 이번 작품을 자신에게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현주라는 캐릭터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보여줘야겠다란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걸 계속 보여주는 것에 흥미가 없어요. 현주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어떤 면들을 극적으로 끌어내면 새로운 걸 보여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어요. 감독님도 그러셨고요."
현주의 자유분방함은 정은채에게 대리만족을 주기도 했다.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캐릭터로 살아가는 배우의 장점이기도 하다.
"자신의 기분을 필터링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이 없잖아요. 사회가 그러기 힘든 구조이고 하고, 그래서도 안되고요. 현주는 그런 부분에서 자연스러운 사람이었어요. 저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삶이었죠. 이 캐릭터를 통해 경험했던 것들이 재미있었어요."
초반의 현주는 세상에서 장애란 없는 인물이다. 후반부에는 결혼과 이혼, 빚 등으로 실패를 경험한다.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인 딸이 생겨나면서 삶의 변화를 맞는다.
"현주는 사람들이 다가가기 진입장벽이 높은 캐릭터잖아요. 납득하기 어려운 인물의 보편적인 감정이 현주의 숨구멍처럼 느껴졌어요. 그런 사람에게 인간적인 면들이 비치며, 연민을 느끼게 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됐죠. 현주를 조금 더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는 유미는 아찔한 구두 굽 만큼 높은 곳에 올라가 있지만, 현주 앞에서만큼은 위축되고 스스로 구두에서 내려와 맨발로 조아린다.
"현주에게 유미는 애초에 같은 공간, 상황에 있을 수 없는 인물인 거죠.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쾌하고요. 그걸 보여주는 장면들이 꽤 있어요. 유미의 집에 가는데 현주는 하이힐 조차도 벗지 않죠. 몸이 기억하는 거죠. 그런 부분을 찾으면서 감상하시면 더 재미있게 보실 수 있어요."
'안나'는 당초 8부작으로 기획됐었다. 8부작 안에는 현주의 학창 시절도 담겨 현주의 본성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 있었지만 6부작으로 수정되며 편집됐다.
"배우로서 아쉽긴 하지만 그 정도도 충분하다고 감독님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청소년기 장면에는 자기 기분을 표출하는 기질, 또한 현주가 할 수 있는 걸 탁월하게 해내는 모습들이 있었어요."
'안나'를 연출한 이주영 감독은 2017년 '싱글라이더'로 데뷔해 평단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정은채는 이주영 감독을 '사람들의 못난 구석을 재미있게 표현하는데 탁월하다'라고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관찰하는 걸 재미있어 하더라고요. 냉소적이면서 담백하기도 하시고요. 그런 면들이 시나리오 속에서 과하지 않게 투영된 것 같아요. 극적인 상황이지만 담백하게 연출하시잖아요."
정은채는 좋은 작품이 있다면 언제든 달려가 연기를 할 준비가 돼 있다. 순간마다 주어진 기회 중 최선을 선택해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자신의 선택들이 흥행, 재력, 인기를 떠나 '지혜를 발휘할 수 있는 경험'으로 이어지길 믿고 있다.
"글이 재미있고 끌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출연을 결정하는 편입니다.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다 이야기가 중요해요. 작품이 사랑 받아야 캐릭터도 사랑 받고 다음에 기회가 또 있으니까요.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 속에서 선택들을 하며, 좋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