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사업종료 앞두고 44년 만에 투쟁
“사태 주원인 경영진의 잘못된 판단 때문”
“정상경영 혹은 공개 매각 진행해야” 주장
“해고는 살인이다. 정리해고 철회하라.”
회사가 내달을 기점으로 돌연 사업을 종료키로 결정하면서 직원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오너가 결정에 따른 뒷정리는 오로지 직원들의 몫이 됐고, 날벼락 같은 해고 소식에 충격에 빠진 전국의 직원들은 생애 첫 투쟁을 위해 새벽 일찍부터 버스에 몸을 실었다.
26일 오후 12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한 푸르밀 본사 앞은 화장한 날씨와 다르게 긴장감이 맴돌았다. 노조 측의 확성기에서는 ‘투쟁가’가 흘러나왔고, 사측을 비판하는 플래카드를 든 노조원들이 줄을 지었다. ‘일하고 싶다’, ‘살고 싶다’ 등의 현수막도 눈길을 끌었다.
본사 내 출입은 철저히 통제됐다. 방패를 든 경찰 병력 20여 명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노조원들의 본사 진입을 막고 있었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가던 길을 멈췄고, 상인들 역시 거리로 나와 대치되는 상황을 관심있게 바라보면서 거리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사측은 지난 17일 전직원에게 정리해고를 통지했다. 유시장 축소로 인해 수년간 적자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등으로 매출이 더욱 급감했고, 누적 적자가 커졌으나 이를 해결할 방안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신준호 회장 둘째 아들인 신동환 대표 취임 후 푸르밀 실적은 악화 일로를 걸었다. 신동환 대표 취임 첫 해 15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이후 2019년 88억원, 2020년 113억원, 2021년 123억원 등 적자폭이 커졌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 푸르밀의 직원 수는 354명이다. 정리해고 대상은 일반직과 기능직 전 사원(푸르밀 전 임직원). 사업종료 및 정리 해고일은 내달 30일이다. 전주와 대구 공장도 내달 25일까지 최종생산을 마치고 30일로 영업을 종료한다.
이날 마이크를 잡은 김성곤 푸르밀 노조위원장은 “푸르밀은 자구적인 노력도 없이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며 “푸르밀 정직원 360명, 협력업체 50명, 직속 농가 25가구, 화물 배송기사 100명 등 모든 가정과 가족들을 파탄내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노동자도 살고 싶고 가정을 깨고 싶지 않다. 지금도 하루하루 눈물로 지새는 가족들을 보면서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다”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본의 아니게 죄인이 되었다. 가족들의 고통과 눈물 한숨을 보며 피가 솟구쳐 오른다”고 울부 짖었다.
그러면서 “오너 일가는 뒷전으로 피하지 말고 앞선에 나서 이번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 반복된 회피가 파장을 더 키우고 있다”며 “이는 비단 푸르밀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대한민국 전체 노동자들의 문제”라고 소리쳤다.
하루 아침에 일터를 잃게 된 이들의 심경은 말로 위로를 건네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날 시위에 참석한 직원들의 속내를 들어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웠고, 굳게 닫힌 마음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기자에 대한 경계심 역시 컸다.
전주 공장에서 28년간 근무한 한국노총 푸르밀 노동조합 소속 장병철씨는 “우리 직원들은 기사 댓글을 읽지 않는다. 강성노조다 민주노총이다 해서 사회적으로 비판을 쏟아내는데, 우리 푸르밀 직원들은 지난 44년 동안 파업 한 번 안 해보고 살았다”며 “회사 한 번 살려보자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회사는) 들어주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노조가 원하는 것은 뚜렷했다. 오랫 동안 몸 담아온 직장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회사의 경영 정상화 혹은 공개 매각 두 가지라고 입을 모았다. 투명하게 공개하고 재매각 등 대안 모색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길 촉구했다.
전주 공장에서 올라온 A(50대)씨는 “대구와 전주공장에서 각각 50명씩 최소 인원만 남겨놓고 올라왔다”며 “공장 분위기는 그야말로 우울하다”고 전했다.
이어 “구직 활동을 하고 있지만 쉽지 않아 회사에서 어떤 조치든 취해줬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구 공장의 B(40대)씨도 “회사가 다음달 문을 닫는다고 하는데 무책임하게 공장에 나오지 않거나 구직활동에 정신이 팔린 직원이 단 한명도 없다”며 “회사가 먼저 배신을 했지만, 직원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직원들은 여전히 공장을 지키고 있다”고 울먹였다.
한편, 40여 년간 푸르밀에 원유를 공급해 온 낙농가들은 전날 푸르밀 본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또 이날 해고 통보 이후 처음으로 고용노동부 소속 근로감석관과 노조를 만나 2시간 가량 비공개 대화를 나눴다. 오는 31일에는 노사 2차 협상을 앞두고 있다.
이날 격려사를 맡은 황인석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은 “우리는 올해 임금인상을 해달라는게 아니다. 수십년간 몸을 받쳐 온 회사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라며 “더 이상 잃을 것도 물러설 곳도 없다.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처럼 그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