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찬사와 비판 뜨겁게 받은 드문 외교관"
미국 외교계에 큰 획을 그은 정치학자이자 전설적인 외교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타계했다. 100세.
AP통신, 뉴욕타임스(NYT) 등은 키신저 전 장관이 29일(현지시간) 미 코네티컷주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그의 죽음은 키신저가 세운 외교 컨설팅기업 키신저어소시에이츠의 발표로 알려졌고,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70년대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정부에서 고위 각료로 일하며 도덕성에 구애 받지 않고 현실적인 외교 정책을 펼친 인물이다. 닉슨 대통령 밑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번갈아 맡던 그는 1973~75년엔 두 자리를 겸직하며 미국 외교의 전권을 휘둘렀다. 당시 키신저의 말과 행보는 전 세계 외교관들의 주요 분석 대상이기도 했다.
닉슨 정부 시절 키신저는 냉전 시기 소련과의 긴장완화정책(데탕트)을 추진했고, 긴 노력 끝에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타결시켰다. 당시 그는 이 협상을 위해 미 국무부와 국방부도 모르게 이나톨리 도브리닌 주미 소련 대사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공산당 제1서기 등을 만나 수차례 비밀협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키신저는 20년 동안 이어지던 미국-베트남 전쟁을 끝내기도 했다. 키신저는 베트남전의 종식을 위해 오랜 시간 북베트남 정부와 긴밀한 협상을 가졌고, 결국 1973년 1월 파리에서 북베트남 정부의 평화 정착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휴전협정을 성사 시켰다. 같은 해 키신저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북베트남 지도자였던 레둑토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외교가에서는 그의 최대 공적으로 ‘중국 개방’을 꼽는다. 키신저는 마오쩌둥부터 시진핑 국가 주석까지 모든 중국 지도자를 상대한 유일한 미 외교관이다. 중국 또한 그런 키신저의 공적을 인정해 그를 ‘인민의 오랜 친구’라고 부르며 최고 예우를 했다. 미중관계가 과거에 비해 많이 악화된 최근에도(지난 7월) 시 주석을 포함한 중국의 주요 인사들은 키신저가 베이징을 방문했을 당시 극진히 환대했다.
키신저는 1971년 스포츠 교류를 통해 국가 간의 긴장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중국과의 ‘핑퐁외교’를 추진했다. 양국이 냉랭한 관계를 한창 이어가던 1971년 4월, 그는 미국 탁구 선수단 15명과 기자 4명을 중국으로 보내 교류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당시 미국 탁구 선수단은 베이징에 도착해 저우언라이 중국 국무원 총리와 면담을 했고, 상하이·광저우 등을 차례 돌면서 20년 이상 막혀있던 미-중 관계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같은 해 7월 키신저는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미-중 정상회담을 논의한 뒤 이듬해 닉슨 전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쇄적인 정책으로 일관하던 중국의 ‘죽의 장막’이 걷히는 순간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방문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서서히 개선되던 중국은 1980년대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되면서 죽의 장막을 완전히 걷어냈다.
업적이 많았던 만큼 그에 대한 비판도 많이 따른다. 키신저는 베트남전 당시 캄보디아 영토에 침입한 북베트남군을 위협하기 위해 당시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에 폭격을 지시했다는 내용이 폭로 됐고,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트리기 위해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의심도 받았다. 1971년에는 파키스탄군의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에 대한 학살전쟁을 묵인하고, 불법 무기 수송을 허가하기도 했다. 그에게 항상 '전범'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이유다.
NYT는 “키신저 전 장관만큼 찬사와 비판을 뜨겁게 받은 외교관도 없을 것”이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대통령에 필적할만한 권력을 가졌던 키신저 전 장관은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극단적 현실주의 노선을 택했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그 어떤 비도덕적인 정책이라도 과감히 실행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