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90세를 일기로 별세
마음도 얼굴도 잘생긴 배우
영원히 ‘영화배우 남궁원’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들의 부고 소식을 접할 때면, 반성이 먼저 고개를 든다. 생전에 이분들의 노고와 공과를 소개하지 못한 것에 관한 아쉬움에서다.
멋들어진 부고 기사를 쓸 자신도 없지만, 그것만이 답일까 고민한다. 그리고 두 가지에 생각이 이르며 자책을 던다.
하나는, OTT(Over The Top, 인터넷TV) 시대다 보니 여러 플랫폼 가운데 어딘가에선 그분들의 영화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한국영상자료원(KFA) 내 영상도서관에 직접 가서 책처럼 영화를 대여해 작은 부스에 앉아 보거나 KFA가 운영하는 시네마테크 상영시간표에 맞춰 옛날 영화를 봐야 했지만, 이제는 KFA가 자체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고전 명화들을 시시때때로 공개하고 있고 그것들이 제법 쌓여 접근이 한층 쉬워졌다.
백문이 불여일견, 글을 통해 고인의 출연작 제목을 접하는 것보다 생전의 작품들을 직접 관람하는 게 더욱 좋은 추모가 되지 않을까. 또 추모가 되기 전에, 영상도서관도 가고 시네마테크 극장도 가고 OTT나 유튜브를 통해 20세기 영화들을 찾아보는 것이 열악한 제작환경에 굴하지 않고 열정과 아이디어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영화의 초석을 다진 분들의 피땀을 기억하는 좋은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영화나 드라마를 꺼내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 만드는 작품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고 전 마지막 작품이 짧게는 10~20년, 길게는 30~40년 전이라고 해도 만일 해당 작품을 리메이크하거나 원안으로 삼은 신작이 최근에 새로 나왔다면 배우에 대한 추억과 작품에 대한 기억이 청년처럼 새로워져서 그 수명을 늘린다.
지난 5일, 90세를 일기로 지상의 스타 배우에서 밤하늘의 별이 된 남궁원(본명 홍경일) 님의 경우 영화 ‘거미집’이 그렇다. ‘거미집’에서 배우 오정세가 맡은 배역 인기스타 강호세, 그리고 그 강호세가 출연한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남자주인공 ‘호세’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1960) ‘화녀’(1971) ‘충녀’(1972)의 ‘동식’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1960~70년대 개봉 당시 부르주아 중년 남성의 변질과 몰락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 캐릭터 박동식. 1960년대 ‘하녀’에서는 배우 김진규, 1970년대 ‘화녀’와 ‘충녀’에서는 배우 남궁원이 연기했다. ‘거미집’의 ‘호세’는 공장에서 여자 공원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점에서는 김진규의 동식과 같지만, 강력한 파워의 부인에게 잡혀 산다든가 애첩과 살림을 차렸다든가 무엇보다 나긋한 태도의 탕아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남궁원표 동식을 연상시킨다.
고전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접근이 쉬운 2023년 작 ‘거미집’을 보면서, 호세를 연기하는 오정세를 보면서, 우리는 반세기 전 남궁원을 한층 더 가까이 오늘 안에서 느낀다. 그렇게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추모 아닐까.
그러면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OTT에서 ‘화녀’와 ‘충녀’를 찾아보며. ‘거미집’ 마지막, 영화 속 영화 ‘거미집’ 시사회에서 찰나의 눈물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정도의 벌만 받은 오정세의 호세와 달리. 끝내 목숨마저 빼앗기는 처절한 응징을 받는 동식에게 연민을 느끼는가 하면.
1958년 노필 감독의 ‘그 밤이 다시 오면’으로 데뷔한 후 출연한 300여 편의 영화를 다 볼 수는 없어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1960) 속 풋풋한 대학생 모습을 티빙에서 보고, 베니스국제영화제 특별상을 받은 이두용 감독의 ‘피막’(1981)을 KFA에서 찾아보면서 문득문득 배우 남궁원을 추억하는 것이다.
문학성 짙은 감독 최하원과 함께한 ‘독짓는 늙은이’(1969, KFA 유튜브 채널)나 ‘다정다한’(1973, KFA 영상도서관)도 좋고. 신상옥 감독의 1968년 작 ‘내시’에서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명종이었다가 이두용 감독의 1986년 작 ‘내시’에서는 사랑을 찾아 궁에 든 내시 정호(안성기 분)를 돕는 내시감 광진이 된 배우 남궁원의 연기 색채 변화도 살펴보고. 이만희 감독이나 임권택 감독, 하길종 감독이나 정창화 감독과 정일화 감독 등 유수의 감독들과 함께한 액션부터 시대극, 로맨스까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다채로운 인간군상을 표현한 배우 남궁원을 흠뻑 느껴 보는 것이다.
이제 2024년 2월 8일이면 평화로이 경기도 포천시 광릉추모공원에서 영면에 들 故 홍경일, 살아서의 영화배우 남궁원. 그는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얼굴도 반듯, 마음도 반듯하게 잘생긴 배우 남궁원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는 없어졌어도 네모난 유리병의 훼미리주스를 그가 현실에서처럼 다감한 가장으로 나와 더욱 인상 깊었던 CF와 함께 기억하듯이, 그 병에 보리차를 담아 마시던 때를 그리워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