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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초에 바라본 우리 사회


입력 2018.09.11 08:18 수정 2018.09.11 08:23        데스크 (desk@dailian.co.kr)

<호호당의 세상읽기> 소득주도성장정책 실패하면 국민들 감당 어렵다

ⓒ데일리안 DB ⓒ데일리안 DB

최근 소득주도성장의 타당성을 놓고 말이 무성하다. 이에 나는 작년 여름쯤이었나, 당시에 읽은 기사 내용이 문득 생각이 났다. 경향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젊은 경제학자 홍기빈 씨의 글인데 다시 검색해보았다. 보니 작년 6월의 기사였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설령 정부가 나서서 큰돈을 푼다고 해봐야 기존의 분배 구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 분배 동맹의 배만 불릴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존의 분배 동맹 자체를 바꾸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 한 ‘소득주도성장’이 실현될 리는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분배동맹이란 말은 영어로 ‘distributional coaltion’ 인 바, 지금은 작고한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멘서 올슨이 창안해낸 용어이다. 좀 더 쉬운 말로는 ‘기득권 집단’이라 하겠다.

올슨은 1982년에 출간된 The Rise and Decline of Nations 이란 제목의 책을 통해 ‘다수를 희생하고 자신의 이익을 좇는 이익집단이 많아질수록 국가는 쇠퇴하게 될 것’이라 말했는데, 지금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정말 그렇다.

분배동맹의 문제는 지금의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논란의 핵심에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년에 읽었던 홍기빈 씨의 기사가 생각이 났다.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자영업자들은 기득권 집단이 아니다. 그렇기에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나 주52시간 근무로 인한 부담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반면에 우리 사회의 노동계층 중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대기업 노조, 즉 강력한 분배동맹을 구축한 집단에게 더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홍기빈 씨의 우려였던 것이다.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정부는 한시적으로 자영업자의 세무조사를 면제 또는 유예를 포함해서 각종 보완 지원책을 부랴부랴 쏟아내고 있다.

게다가 부동산 시장이 다시 움직이고 있는데 이 역시 현 정부의 정책과 무곤하지 않다. 작년 정부 출범과 함께 도심재생 사업이 발표되었을 때 나 호호당은 즉각적으로 저 역시 문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결국 뉴 타운이나 도심 재생이나 같은 말이지 싶었다.

무엇보다 수년간 지속된 저금리로 인해 시중엔 엄청난 양의 부동자금이 갈 곳을 찾고 있는 판국이 아닌가 말이다. 정작 불씨가 된 것은 박원순 시장의 ‘여의도 용산 통개발론’이었지만 그 이전에 도심재생이란 부동산 부양의 명분을 바탕에 깔아놓은 것은 정부였던 것이다.

집값이 오르면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못한다. 둥지를 틀 돈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가끔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남극의 펭귄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모여서 알을 낳고 새끼들을 부양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또 너른 바다 바위섬 벼랑에 무수히 많은 새들이 작은 둥지에 알을 낳고 키우느라 서로 다툼을 하는 장면도 보곤 한다.

보면서 쓴 웃음을 짓곤 한다. 남극이나 대양의 외딴 섬이나 대한민국의 서울이나 집을 구하기 어렵긴 마찬가지구나,

애당초 2005년 DTI라는 제도가 도입될 당시부터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비율만 적용했더라도 오늘날 가계부채 1500조는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소비여력 고갈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직접 나서서 부동산 가격 상승을 잡겠다고 했는데, 당시 나는 저 분의 뜻이야 알겠으나 높은 DTI 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일반 선진국들의 DTI는 통상적으로 28-36% 선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간 50-60% 대를 유지해왔다. 대출 원리금 상환이 소득의 50-60%까지 되어도 크게 문제가 없다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없을 까닭이 없다. 오로지 대출을 많이 받게 하고 편하게 받게 하기 위해 비율을 엄청나게 높게 잡아놓은 것이다.

몇 년 전인가 IMF가 우리나라의 DTI가 너무 높다는 경고를 보내왔지만 당시 금융위원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답한 기억이 난다.

하지만 높은 DTI 비율로 인해 가계대출이 폭증했고 그만큼의 통화량이 늘어났으며 여기에 지속된 저금리로 인해 시중엔 무지막지한 유동자금이 꿈틀대고 있는 현실이다.

그 결과 청년들은 남극의 펭귄들 마냥 둥지를 틀지 못하고 있다. 그 바람에 저출산이 대세로 정착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인구절벽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10년에 걸쳐 우리 사회는 감당할 수 없는 소비를 해온 셈이고 오늘에 이르러 모든 지표들이 악화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인 것이다.

사람들은 박근혜 정부가 한 것이 없고 무능했다는 인식을 하고 있지만 사실 처음엔 경제혁신3개년 계획을 통해 우리 경제의 문제점을 구조 조정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었다. 어려운 작업을 시도했던 박 정부였다.

하지만 기득권 노조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에 궁지에 몰린 박 정권은 부동산 부양으로 경제 수치들을 만들어내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이번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들고 나와 분배 구조의 개선을 도모하고자 한다. 하지만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현 정권의 지지기반이 대기업 노조라고 하는 강력한 분배 동맹 세력이란 점에서 한계를 안고 있다.

최근 경향신문에서 재미난 글을 읽었다. ‘촛불 다중의 균열’이란 제목의 글이다. 임현백 교수가 기고한 글이다.

직접 옮긴다.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키고 지탱해온 다중연대는 왜 정점의 순간에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가? 다중연대는 정체성이 다른 이질적 집단이기 때문이다. (중략) 문재인 정부는 이질적인 다중들의 다양한 요구를 맞춤형으로 수용하고 실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다중연대를 구성하고 있는 집단들의 분리주의적 이탈을 초래하고 있다.”

약간 달리 설명해보면 현 정부가 처음에 지지율이 대단히 높았으나 그 지지층의 성격이 다양한 탓에 시간이 지날수록 지지층이 이탈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편하게 얘기해보면 지지층 상호간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고 서로 상충되는 경우도 많다는 얘기가 되겠고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기득권인 민노총의 이해와 20-30대 청년들의 이해가 상충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걱정을 했었다. 처음에 대통령 지지율이 무려 80%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실 소름이 끼쳤다. 지나치게 높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지한다는 것은 크건 작건 뭔가를 바란다는 얘기인데, 나중에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 저건 더 문제인 데 하는 걱정이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처럼 지나친 지지율은 지나친 非(비)지지율로 바뀌거나 아니면 냉소적으로 변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대중에 대한 ‘감성적인 접근법’이 현 정부의 나름 큰 강점이지만 그게 나중엔 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으리란 우려가 들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이번 개각에 대한 이종철 바른미래당 대변인의 논평, “여성가족부 장관은 '페미 대통령'을 부각하지 못한 책임을 지운 것이거나 탁현민 행정관을 지키기 위해 경질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이 바로 그런 대목이다.

정권과 정책을 좌우 성향에 따라 바라보는 것은 선입견에 매몰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늘 해오고 있다. 그건 미리부터 답을 정해놓고 바라보게 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역대 정권들은 물론 정권을 유지하고 창출해야 하는 것이 우선적이긴 했으나 주어진 한계 안에서 나라를 발전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강한 의지도 갖고 있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모든 정권들이 잘 해보려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2012년부터 우리 사회는 내부의 이익 갈등이 엄청나게 첨예화되고 증폭된 반면 성장동력은 상실 일로를 걷게 되면서 정부가 운신할 수 있는 여지가 급속도로 축소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8월 초에 나온 KDI 경제동향 보고서의 전체적인 내용은 투자 감소, 건설경기 하락, 실업률 상승이었다. 며칠 후면 9월 동향이 나올 터인데 그 역시 궁금하다.

정부는 이번 개각으로 보완할 것은 보완해가면서 소득주도성장정책을 더욱 신속 과감하게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정말이지 나름 성과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간 들어보지 못한 정책, 하지만 나름 개성이 있고 의미가 있는 정부의 이번 소득주도성장정책이 만일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국면이 우리 전체를 짓눌러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자꾸만 걱정이 앞선다. 그 바람에 이런 글을 쓰게 된다. 당분간 자제할 생각을 해본다.

글/김태규 명리학자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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