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흠돌의 반란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건 아주 쉽다. 바로 그 유명한 ‘토사구팽(兔死狗烹)’이기 때문이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는다는 뜻의 고사성어는 권력의 속성과 매정함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의 책사인 범려가 처음 쓴 말인데,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권력다툼에서 밀려나면서 솥으로 들어가는 사냥개 신세가 되었다. 김흠돌은 사냥개, 그것도 아주 뛰어난 사냥개였다. 자기보다 몇 배나 덩치가 크고 사나운 호랑이 같은 당나라와 맞서 싸워서 끝끝내 승리했기 때문이다.
서기 661년 7월, 김흠돌은 대당장군에 임명되어서 동료 장수들과 함께 백제 땅으로 쳐들어갔다. 전해에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가 멸망했지만, 사방에서 들불처럼 부흥군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당장군은 신라의 중앙군단인 6정 중 하나인 정예군인 대당을 이끄는 지휘관이다. 백제의 부흥군과 전투를 치른 김흠돌의 다음 무대는 고구려였다. 서기 668년 6월, 당나라와 함께 평양성으로 진격하는 신라군 지휘부 중에 대당총관으로 임명된 그의 이름이 보였다. 역시 대당을 지휘하는 장군으로서 고구려와의 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해 겨울 고구려는 멸망하고 만다. 김흠돌은 공로를 인정받아 네 번째로 높은 등급인 파진찬에 오른다. 여기까지 오른 걸 보면 진골 귀족이었지만 전쟁에서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승진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진 이후 당나라는 신라라는 사냥개를 솥에 넣으려고 했다. 신라는 몸부림을 치면서 솥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역사 속에서 나당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영토의 크기와 인구수에 비례 되는 군사력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신라는 끝끝내 싸워서 당나라군을 몰아낸다. 중간에 여러 번 패배를 당하고 김유신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위기에 몰렸지만 이겨낸 것이다. 김흠돌은 이 과정에서 공을 세워서 파진찬에서 한 단급 높은 잡찬에 임명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무왕의 아들인 태자 정명과 딸이 혼인을 한다. 그러니까 태자의 장인이 된 셈이다. 아마도 김흠돌은 정말로 열심히 당나라군과 싸웠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과 집안에게 큰 영광과 권력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당나라가 물러나면서 나당 전쟁이라는 기나간 싸움이 끝난다. 거기다 자신의 딸과 결혼한 태자 정명이 드디어 문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서 신문왕으로 불린다. 아마, 김흠돌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신문왕이 즉위한 서기 681년 7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냥이 끝나고, 이제 사냥개가 솥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40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로 즉위한 신문왕은 왕좌에 오르자마자 솥뚜껑을 확 열어 버린다. 독자적인 결정이었다기 보다는 아버지인 문무왕이 살아있을 때부터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 나당 전쟁까지 다 지켜본 신문왕은 이미 태자 시절부터 노련한 정치인이었고, 왕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진골 출신의 장군들의 힘과 명성은 한없이 높아졌다. 이들을 통제하고 찍어누를 김유신이 없는 상태였으니 신문왕으로서는 왕권을 안정적으로 행사하고, 후대에 잘 물려주기 위해서는 대책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7월에 즉위한 신문왕은 다음 달인 8월에 아버지 문무왕이 전해에 국무 총리격인 상대등으로 임명한 김군관을 국방부장관 격인 병부령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측근으로 추정되는 이찬 관등의 진복을 상대등으로 삼아버린다. 회전문 인사처럼 보이지만 나당 전쟁 때 맹활약한 공로로 상대등에 오른 김군관으로서는 기분 나쁜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불과 며칠 지나지 않은 8월 8일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8월 8일에 소판 김흠돌(金欽突),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등이 반란을 꾀하였다가 처형당하였다.
김흠돌이 동료인 흥원과 진공등과 반란을 모의했다가 처형당했다는 내용이 전부인데 공교롭게도 전부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은 물론 나당전쟁때 공을 세워서 승진한 장수들이었다. 문무왕이라면 통제가 가능했지만 그의 아들인 신문왕으로서는 버거운 존재들이었다. 김군관을 상대등에서 병부령으로 삼은 것을 숙청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면 김흠돌로서는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신문왕과 결혼한 자신의 딸이 오랫동안 후사를 얻지 못한 상황까지 이어지자 김흠돌이 반란을 꾸몄던 또 다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신문왕은 8월 16일 발표한 교서를 통해 반란의 내막을 자세히 설명한다. 공이 있어서 승진한 것이 아닌데 거만하게 굴면서 궁궐 내부의 세력들과 손을 잡고 불충한 음모를 꾸미다가 자신에게 적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려고 하자 도망치거나 혹은 궁궐 앞에 와서 잘못을 빌었는데 용서하지 않고 모조리 처벌했다는 내용이다. 교서의 내용만 보면 김흠돌이 실제로 반란을 꾸몄는지 아닌지 모호하지만 신문왕은 가혹한 처벌로 진골 귀족 세력들을 억눌렀다. 상대등에서 병부령으로 강등된 김군관 역시 역모를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당했다. 쓸모가 없어지고 위험해진 사냥개가 역모라는 가마솥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정명섭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