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목표 설정한 싱가포르 선언
재확인하고 군축협상 모색할까
'레토릭'으로 북미 접점 찾을 우려
정부 인사는 '메시지'다. 정권교체에 따른 '물갈이'는 향후 정책 방향을 상징한다. 국제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인사권을 행사하며 외교·안보 포스트를 속속 채워가고 있다. 다만 인선을 마친 주중·주일대사와 달리 주한대사 지명까지는 상당 시일이 소요될 전망이다.
현재 미국대사관을 이끄는 사람은 조셉 윤 주한미국대사 대리다. 그는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임기 종료를 앞두고 파견한 인사다.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로 일했던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대사가 한국에 부임하기 전까지 한미 정부의 가교 역할을 맡을 전망이다.
'대리'라는 직함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혼란한 한국 정세와 북한 변수를 관리하기 위해 투입된 소방수에 가깝다. 운신 폭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북한 전문가인 그가 밝혀 온 입장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난해 말 개최된 한 포럼에서 "현실을 우선 받아들여야 한다"며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앞에 두고 협상하는 건 있을 수 없다.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 핵폐기)라는 표현을 과거에는 썼지만,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실 관련 입장은 바이든 행정부 분석과도 일맥상통한다. 커트 캠벨 전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해 11월 진행된 대담에서 "'한반도에서의 북한 비핵화'라는 지속되는 아이디어가 과거 시기 외교의 기본 토대였다"면서도 "김정은이 앞으로 그 조건을 받아들일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에선 완전한 비핵화를 장기적 목표로 설정하되, 단기적으로는 핵군축과 제재 완화를 주고받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평가가 상당하다.
윤 대사 대리도 "장기적으로 비핵화를 달성하려 하되, 이를 위해선 군축, 동결, 신기술 중단 그리고 남북 간 관여 같은 '작은 단계'가 필요할 것"이라며 "궁극적으로는 협상 테이블에 상대가 원하는 것을 올려놔야 한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제재 완화"라고 강조했다.
중국 견제에 집중해야 하는 미국 입장에선 북한이 말썽을 피우지 않는 게 중요하다. 30년 묵은 북핵 문제 '해결'보다는 '관리'에 주력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관련 맥락에서 '김정은이 핵역량을 보유했다(nuclear power)'는 트럼프 대통령 최근 발언은 흘려듣기 어렵다. 속내를 알기 어렵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연락을 취해보겠다고 했다. 정상 채널을 가동해 단절된 북미관계 개선을 모색하겠다는 탑다운 접근법이 부활하는 셈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개인적 친분과 실제 협상 재개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북한은 하노이 노딜 여파로 트럼프 1기 때부터 '조건 없는 대화'조차 거부해 왔다. 지난해 결산회의에선 '최강경 대미 대응전략'까지 천명했다. 이렇다 할 명분 없이 급작스레 협상 복귀를 선언하긴 어려울 전망이다.
협상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느냐가 핵심인 상황에서 윤 대사 대리는 싱가포르 선언을 출발선으로 제시했다. 그는 "싱가포르 선언을 바탕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하노이에서 완료하지 않았던 텍스트를 출발점으로 삼는 게 중요할 것"이라며 "많은 이들이 하노이가 '나쁜 딜'이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딜이 없을 경우 북한은 더 위협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선언은 지난 2018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등에 합의하며 마련한 문건이다.
앞서 바이든 행정부도 대북정책 목표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로 설정하며 사실상 싱가포르 선언을 계승한 바 있다. 미국에 강경한 입장을 표명해 온 북한 역시 싱가포르 선언에 대한 무효화는 언급한 적이 없다. 다만 '핵무력 강화 노선은 불가역적 정책'이라고 못 박아, 비핵화를 목표를 설정한 싱가포르 선언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평가다.
간극을 메우기 위해 미국이 꺼낼 수 있는 카드가 '레토릭'이다. 싱가포르 선언 위에서 핵군축에 합의할 경우, 북한은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얻었다며 환호할 수 있고, 미국은 장기적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그리고 몇 년 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