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지난달 中 방문 때 가스관협상 타결 불발
中, 러에 가스가격·공급량 놓고 ‘불합리한 요구’
“시간은 내편” 中, 최상조건 제시까지 인내할듯
유럽 판매 급감에 어려움 겪는 러 경제에 빨간불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감지된다. ‘공동의 적’ 서방에 맞서 ‘브로맨스’를 자랑하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가스 파이프라인 협상을 둘러싸고 균열 조짐을 보이는 까닭이다.
중국에 가스관을 연결해 안정적 수익을 올리려던 러시아가 중국 정부의 무리한 요구로 위기를 맞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이 이 사안에 정통한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지난 2일 보도했다. 러시아가 중국과 주요 가스관 계약을 체결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가격과 공급량을 놓고 중국이 ‘불합리한 요구’를 하는 바람에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실제로 지난달 16~17일 중국을 국빈 방문한 푸틴 대통령은 '파워 오브 시베리아-2' 가스관 관련계약을 끝내 맺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갔다.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에 따르면 시진핑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발표한 공동성명에는 주요 에너지 공동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는 모호한 약속만 담겼다.
푸틴 대통령은 17일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중국과 ‘파워 오브 시베리아-2’ 가스관 합의가 이뤄졌느냐는 질문에 "가스프롬 등 우리 석유 기업들이 확실하게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며 "몽골을 통과하거나 북극해 항로를 이용하는 등 다양한 경로가 논의되고 있다"고만 말했다. 당초 이번 정상회담에서 계약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불발된 것을 사실상 시인한 셈이다.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서방의 제재로 가스 수출 길이 막힌 러시아로서는 중국에 대한 가스공급이 ‘러시아 경제의 유일한 희망’인데, 중국이 이를 지렛대로 삼아 더 유리한 계약을 맺으려고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는 통에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중국과 러시아는 시베리아 지역 가스전에서 생산된 천연가스를 몽골을 거쳐 중국 서부 신장(新疆)위구르 지역으로 공급하기 위한 ‘파워 오브 시베리아-2’ 가스관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가스관 건설이 승인되면 유럽 의존도가 높았던 러시아 서부의 가스전을 중국과 연결할 수 있게 된다. 러시아의 국영 가스기업인 가스프롬의 경영뿐 아니라 러시아의 ‘경제적 운명’에도 숨통이 트이는 셈이다.
이런 만큼 러시아는 이 가스관이 독일 등 유럽으로의 가스공급 확대를 위해 건설돼 화수분 역할을 해오던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유럽에 공급하던 러시아 서부의 가스전을 중국으로 연결하면 푸틴 대통령의 ‘돈 줄’로 알려진 가스프롬을 살릴 수 있어서다.
가스프롬은 유럽 지역에 가스를 공급하면서 2022년에도 1조 2000억 루블(약 18조 5000억원) 규모의 순이익을 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전쟁 발발 이후 유럽 가스판매가 급감하는 바람에 지난해 69억 달러 규모의 손실을 내는 등 25년 만에 최악의 한해를 보냈다.
우크라이나전쟁 발발 이전 10년 간 러시아가 수출한 연평균 가스 수출량은 2300억㎥인 데 반해 지난해 수출량은 10분의 1도 안 되는 220억㎥에 불과했다고 FT는 전했다. 올해 말 우크라이나와의 환적 계약이 만료되면 더 줄어들 전망이다. 연말이면 우크라이나에서는 더 이상 환적을 할 수없는 만큼 가스 수출량이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돈독한 관계를 앞세워 가까운 시일 내에 ‘파워 오브 시베리아-2’에 대한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알렉산더 노박 러시아 부총리가 인테르팍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가까운 미래에 파워 오브 시베리아-2 가스관에 대한 계약을 체결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신감을 가진 푸틴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며 3가지 주요 사항을 요청했다고 FT는 강조했다. 러시아 내 중국은행의 활동 확대와 이달 우크라이나 평화회의에 중국 불참, ‘파워 오브 시베리아-2’에 대한 합의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가스관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중국은 러시아 현지 수준과 비슷한 가격으로 가스를 공급하도록 강력히 요구하고 있고 연 500억㎥ 수송 용량 중 일부만 구매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러시아는 만족스러운 협조를 얻어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중국은 이미 다른 국가보다 낮은 가격에 러시아산 가스를 쓰고 있다. 미 컬럼비아대 글로벌 에너지정책 센터(CGEP)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170 bcm(1bcm=10억㎥)의 가스를 사용했으며, 2030년에는 250 bcm이 필요할 전망이다. CGEP에 따르면 중국은 100만 BTU(열량 단위)당 미얀마에서는 10달러, 우즈베키스탄에서는 5달러를 지불하고 있지만 러시아에는 4.4달러만을 내고 있다.
러시아는 특히 우크라이나전쟁 이전 유럽에 평균 10달러에 가스를 수출한 바 있다. 크레이그 케네디 뱅크오브아메리카 전 부회장은 "(가스프롬의) 유럽으로부터의 손실은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단호히 말했다.
게다가 중국이 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우크라이나 정상회담에 불참했지만 은행 협력에 관해서는 한 곳 정도의 은행에 그치는 등 러시아 요구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 머물렀다. 더군다나 푸틴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에 알렉세이 밀러 가스프롬 최고경영자(CEO)가 동행하지 않았다. 타티아나 비트로바 미 컬럼비아대 글로벌 에너지정책센터 연구원도 “밀러 CEO의 부재는 매우 상징적”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밀러 CEO는 중국 대신 이란을 방문했다.
러시아 측은 가까운 시일 내에 ‘파워 오브 시베리아-2’ 가스관 개발사업이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지만 계약 성사까지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FT가 확인한 러시아 금융기관의 미공개보고서에 따르면 가스프롬은 사업 전망에서 파워 오브 시베리아-2 부분을 제외했으며, 이에 따라 가즈프롬 2029년 예상수익은 15%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중국 입장에서도 러시아를 통해 가스공급처를 다변화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해상경로가 아닌 육상경로로 안전하고 저렴하게 가스를 공급받기에 러시아가 최고의 선택지다. 알렉산더 기부에프 베를린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센터 소장은 “중국은 대만이나 남중국해 분쟁 발생 시 해상 경로가 아닌 육로로 이송되는 안전한 에너지 공급원으로 러시아 가스가 전략적으로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기부에프 소장은 그러나 “중국으로서는 매우 저렴한 가격과 유연한 공급량이 없다면 이 협상이 그다지 가치없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이미 합의한 수입계약 등을 통해 2030년까지 가스 수요와 공급이 이미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비트로바 연구원 “중국은 시간이 자기 편이라고 믿고 있으며 러시아로부터 최상의 조건을 끌어낼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러시아는 가스 수출을 위한 대체지가 중국 외에는 없다는 점에서 협상에서 밀릴 수 밖에 없는 처지다. 기브에프 소장은 “러시아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단언했다. 이번 중·러 정상회담에서 합의가 없었던 이유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지난해 말 중국이 서방제재로 궁지에 몰린 러시아의 절박한 상황을 노려 흥정하는 입장을 취함에 따라 계약 체결이 예상보다 늦어질 것 같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전했다. 소식통은 SCMP에 러시아가 프로젝트 전체에 재정을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중국이 고수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글/김규환 국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