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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가 문재인 정부에 보내는 경고


입력 2017.09.01 07:13 수정 2017.09.01 07:25        데스크 (desk@dailian.co.kr)

<자유경제스쿨>원유 수출을 퍼주기로 소진한 차베스

공짜에 길들여진 국민의식이 가져온 참사 '반면교사'

라틴아메리카내에서 GDP 선두인 베네수엘라를 최악의 부채국가로 전락시킨 우고 차베스.ⓒ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sation 라틴아메리카내에서 GDP 선두인 베네수엘라를 최악의 부채국가로 전락시킨 우고 차베스.ⓒ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sation

지난 달 말경, 상 파울로에서 30년간 민간경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뉴욕 태생 언론인이자 라틴아메리카 전문가인 지인으로부터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정치 불안으로 국제 언론의 이목을 끌고 있던 베네수엘라의 상황에 관한 파이낸셜 타임스 칼럼을 브라질 신문에서 번역 전재한 파일과 함께 아래의 코멘트가 첨부되어 있었다.

“나는 구겐하임재단(Guggenheim Foundation)의 지원을 받아 아메리칸 대학의 연구원으로 6년(1968-1974)을 베네수엘라에서 지냈다. 남아메리카 모든 나라들이 군사독재 정권이던 당시 예외적으로 베네수엘라는 안정적이고 번영하는 민주국가였다. 오늘날 그 나라는 국민들의 안녕을 위한 방향제시도 하지 못한 채, 끝없는 부정부패의 재미에 빠져있는 정치인들 아래서 민주주의를 남용하는 최악의 모델이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베네수엘라는 브라질 사람들에게 유용한 경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고가 베네수엘라의 이웃나라 브라질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고로만 들리지 않고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로 들려 안타깝다. 내년 정부예산이 427조원으로 잠정 편성되었고, 그 삼분의 1인 140조원이 복지에 쓰일 것이라는 지난 주말 뉴스까지 문재인 정부 100일 동안 쏟아낸 나라살림 거덜 낼 무책임한 정책들 - 최저임금 인상, 법인세 인상, 근로시간 단축, 지주회사 규제 강화, 탈 원전 등 -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이 짧아 아직 드러내지 않은 반자유주의적, 반민주적 복안들이 앞으로 드러나면서일 것이다. 그래서 베네수엘라는 20년(혹은 30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어떻게 완벽한 국가실패, 즉 민주정치 제도, 시장경제질서, 사회안전망 및 치안의 완전한 붕괴에 이르렀고, 지금도 악화 일로에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왜 국가실패라고 하나?

세계은행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보다 10% 더 많은 세계 최대의 석유매장량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굶주림으로 내몰리고 있는 그 나라의 실상을 보여주는 아래 데이터들을 보면, 왜 우리가 이를 국가실패로 규정하는지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1) 석유수입 덕분에 1945년 이래 1995년까지 반세기 동안 줄곧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일인당 GDP를 자랑하던 나라가 작년에는 남아메리카 평균수준으로 떨어졌고, 1년 혹은 2년 후에는 남미 주요국가들 중 가장 낮아질 것으로 추정된다. (2)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고 있어 금년에는 1,000%에 이를 전망이다. (3) 10여 년 동안 한 자리 수에 머물던 실업률이 2년 전부터 급상승하여 금년에는 25%를 넘어설 것으로 IMF는 예측하고 있다. (4) 표준가계의 기본 식료품 구입비용이 최저임금의 15배이다. (5) 93%의 국민이 기본 식료품을 구입하기에도 충분한 소득을 벌지 못한다. (6) 국민 네 명중 세 명이 지난해에 체중감소(평균 9kg)를 경험했다. (7) 경제실패는 사회불안으로 이어졌고,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살인에 의한 사망자수(인구 10만 명당 91.8명)를 기록하고 있다. (8) 상황이 악화되자 해외에서 출구를 모색하는 사람이 급증해 금년 상반기 해외 망명 신청자 수는 5만 명으로, 이는 작년과 재작년의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와 세 배 늘어난 숫자이다.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미국으로의 망명 신청자 수에서 베네수엘라가 중국과 멕시코를 앞질렀다. (9)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 중 하나로 NGO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부패지수 랭킹에서 176개국 중 166위를 차지했다. 미주대륙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부패한 나라이다. (10) NGO '프리덤 하우스 Freedom House'가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를 종합평가하는 ‘자유지수’에 근거한 베네수엘라에 대한 정성 평가는 ‘자유롭지 못한 Not Free'이다. 미주지역에서는 쿠바와 함께 두 나라 뿐이다. 이 나라가 자유롭지 못한 나라라는 더 확실한 증거는 반정부 시위 도중 사망한 시민의 수가 지난 4월 이래 120명에 이른다는 사실일 것이다.

차베스의 등장 배경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현재의 베네수엘라 혼란상은 포퓰리스트 차베스(Hugo Cháves)의 집권 이래, 그와 그의 후계자 마두로(Nicolás Maduro) 대통령이 취한 일련의 사회주의적 정책들에 그 원인이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정책을 표방한 포퓰리스트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책들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음에도 왜 이를 막지 못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20세기 베네수엘라의 역사를 석유수출 소득의 부침이 취약한 정치 제도에 미친 영향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차베스의 등장은 1970년대 석유파동이 안겨준 뜻밖의 소득 증가로 서유럽 국가들에 버금가는 일인당 소득과 소비수준을 누리다가 1980년대 초 유가 하락과 중남미 국가들의 대외채무 위기로 촉발된 경제상황 악화의 결과라고 하겠다. 대외채무 상환위기에 직면하자 1983년 볼리바르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했고 소비재의 수입 의존도가 높은 산유국의 특성상 평가절하는 극심한 물가고를 불러왔고, 실질소득 하락으로 새로이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가계도 증가했다.

이렇게 늘어난 저소득 계층의 불만이 무능한 정부정책과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와 합쳐지자 정치적 불안이 고조되면서 폭발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치러진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IMF의 구조조정 권고안을 ‘사람만 죽이는 폭탄’이라고 비판하며 반-신자유주의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된 페레스(Carlos Andrés Pérez) 대통령이 1989년 취임 직후 채무불이행 위기에 직면하자 국영기업의 민영화, 탈규제, 보조금 및 사회복지 프로그램 축소를 골자로 하는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받아 들였다.

이어서 휘발유 가격과 대중교통 요금을 인상하자 수도 카라카스와 주요 도시에서 잇달아 대규모 시위(Caracazo)가 벌어졌고 시위가 과격해지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 진압하면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가하락과 부정부패가 합작한 정치드라마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3년 후 1992년에는 차베스가 주도한 쿠데타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후일을 기약하게 된다. 이어서 1993년에는 페레스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탄핵되었고,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된 칼데라(Rafael Caldera)는 취임 후 차베스를 사면, 복권시킨다.

차베스는 일찍이 사관생도 시절 스페인의 남아메리카 식민 지배를 종식시킨 페루의 아야쿠초(Ayacucho) 승전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고, 그 때 페루의 군부 혁명정부 대통령 벨라스코 (Juan Velasco Alvarado)의 사회주의 개혁정책에 감동되어 사회주의혁명이라는 ‘정치적 열망’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정치적 열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초급장교 시절이던 1980년, 형 Adán의 소개로 강경노선 때문에 공산당에서 출당되어 ‘베네수엘라혁명전선 Frente Revolucionária Venezolana(FRV)'을 이끌고 있던 베테랑 게릴라 리더 브라보(Douglas Bravo)를 만나면서부터이다. 1982년에는 비밀결사 ’볼리바르 혁명운동-200 Movimiento Bolivariano Revolucionario-200(MBR-200)‘을 조직하여 군부 내에서 세 규합에 나서는 한편, 대외적으로 민간 좌익세력과의 네트워크도 만들어 나갔다.

이 MBR-200이 1992년 쿠데타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차베스의 정치 역정에서 중요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1992년 쿠데타에서 차베스는 카라카스로 진격해 대통령 궁을 점령할 혁명군을 지휘했으나 이에 실패하고 오히려 정부군에 항복하여, 정부군의 요구에 따라 다른 지역에서 주요 군사기지를 점령하고 있는 다른 혁명군들이 총을 내려놓을 것을 설득하는 방송을 하게 된다. 생중계된 이 방송에서 군복차림의 그는 감동적 연설로 많은 베네수엘라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영웅으로 부상하게 된다.

“동지들이여, 안타깝게도 지금은 우리의 목표가 수도에서 달성되지 못했지만 … ”으로 시작한 연설에서 ‘지금은 por ahora'이라는 구절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갖고 싶은 민초들에게 앞날을 약속하는 그의 다짐으로 들린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의 대중적 인기가 6년 후 그를 대통령의 권좌에 오르게 한다.

국가 실패, 왜 막지 못했나?

1999년 2월 대통령 취임 후 군과 정보기관을 ‘MRB-200' 및 92년 쿠데타 동료들에게 맡겨 권력 장악을 확고히 하자,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무력화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고 또 장기집권이 가능하도록 하는 개헌 준비에 시간과 정력을 집중한다. 먼저 개헌안을 만들 제헌의회 구성안을 만들어 4월 25일 국민투표에 부쳤고 88%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된다. 7월25일 치러진 제헌의회의원 선거도 압도적 승리였다. 125석 중 반대세력은 여섯 석을 얻는데 그쳤다.

제헌의회가 활동에 들어가면서, 기존 헌법기관들과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첫 충돌은 사법부와의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는 법리 논쟁의 차원이 아니라 사법부를 무력화하여 대통령의 수족으로 전락시키려는 첫걸음이었다. 대법관들은 8:6으로 제헌의회가 주장하는 모든 권리가 합법이라고 판결하였고, 대법원장은 사임하고, 190여명의 법관들이 부패혐의로 직무정지 되는 것으로 ‘사법 비상사태’가 종결되었다. 제헌의회는 ‘입법 비상사태’도 선언하여 기존 국회의 업무를 예산심의 정도로 제한하자, 국회는 휴회를 선언했다. 이런 상태에서 새 헌법 초안이 작성되었다.

차베스가 선거에서 공약했던,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내용들과 함께 그에 반대하는 기존정당의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는 독소조항, 예를 들어 정당에 대한 국고지원 폐지 등을 담았다. 개헌안은 12월15일 국민투표에서 72%의 찬성으로 확정되었다. 찬성비율이 높아 보이지만, 투표율이 50%에 미치지 못해 압도적 찬성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새 헌법으로 바뀐 내용은: 권력구조에서는 5년 단임에 10년 후 재선을 허용하던 대통령 임기를 6년 중임제(2009년 이 제한도 폐지됨)로 바꾸어 차베스의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놓았고, 대통령령으로 할 수 있는 입법 범위를 확대하고, 국방으로 국한되었던 군의 역할에 공공질서 유지와 국가발전에 도움을 주는 일을 추가했다. 입법부는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바뀌었고, 국회의 대통령 탄핵 권한을 박탈하고 이를 국민소환제로 바꾸었다. 이제 삼권분립의 원칙이 유명무실해졌고, 나쁜 정부를 국민이 바꿀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이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든 것이다.

이제 차베스에게 남은 과제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주었고, 자신이 원하는 개헌을 지지해준 유권자들의 충성도가 약화되지 않도록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소득 재분배 정책으로 보답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그에 반대하는 기성 정치인들에 남겨진 합법적 투쟁수단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축출하고자 하는 시도가 계속되었지만 대중의 지지가 없어 번번이 실패했다. 2002년 봄 반차베스 군부가 그를 감금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의 지지자들의 시위로 이틀 만에 권좌에 복귀했고, 그해 말에는 국영 석유회사의 총파업으로 그에게 타격을 주려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야권이 2004년에는 새 헌법의 국민소환제로 승부를 걸었으나, 유권자 70% 투표에 소환반대 59%로 차베스 지지층의 충성심만 확인했다. 그 이후 2006년과 2012년에 치른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차베스는 큰 표차로 당선된다. 공정한 선거였지만 나쁜 정부를 바꾸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그러면 차베스는 국민의 지지를 어떻게 얻었나?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베네수엘라 정치의 첫 번째 중요변수인 원유가격이다. 그의 대통령 재임기간은 원유가격이 12달러(서부텍사스 중질유 기준)대에서 93달러까지 오르는 추세적 상승기였다. 이 수입의 상당 부분은 그의 지지자들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사용할 수 있었고, 고평가된 환율로 소비 붐을 누릴 수 있는 중산층들의 불만도 완화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요인은 대안 세력이 되어야 할 기성 정치인들은 이미 ‘없는 자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엘리트’로 낙인이 찍힌 상태여서 저소득층의 신뢰를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이다.

질문으로 베네수엘라 얘기를 끝내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나쁜 정부를 바꿀 수 있는 제도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지금 재점화 되고 있는 개헌 논의로 만들어질 개헌안은 이 질문의 답에 어떤 영향을 줄까?

글/김우택 한림대 명예교수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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